En Hakkore

[Hebrews 70]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70]

En Hakkore 2024. 6. 3. 11:19

사라의 믿음 1(히 11:10,12)

사도는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 본문 말씀 속에서, 정말 좌절케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나서도 굽히지 않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기이한 능력을 주목한다.

그 믿음은 참으로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를 만나도 견뎌내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확신케 한다. 이 본문 말씀은 연약하고 나이가 많은 여자가 그 믿음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불신앙의 작용으로 장애를 받고 흔들렸지만, 결국 그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의뢰했고 그의 약속을 믿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에서 믿음이 얼마나 심오하게 실제적인 것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믿음은 영혼을 하늘에까지 높여 줄 뿐 아니라, 땅 위에 있는 몸에게 힘을 내게 할 수도 있다. 이 본문 말씀은, 작은 시작이 때로는 얼마나 큰 결말을 가져오는지를 증거한다.♥

또한 호수에 돌 하나를 던지면 파문은 더 큰 원을 이루면서 물결이 이루어나가듯이, 믿음도 세대가 지남에 따라 더 많은 열매를 맺음을 보여 준다. 여기 11절을 숙고하면 할수록,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안락의자에 앉아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론적이고 머리로 가지는 믿음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함을 더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믿음"은 어둠과 빛의 차이처럼 히브리서 11장에 묘사된 믿음과 차이난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이요, 히브리서 11장에서 묘사되는 믿음은 행실로 나타난 믿음이다.

그 말로만 하는 믿음은 시련을 만났을 때 깨어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모든 시련을 만나서도 끝까지 견디어 낸다. 전자는 역사하지 않고 효력없는 믿음이요, 후자는 역사하고 능력 있는 믿음이다. 전자는 아무것도 내지 못하고, 후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 그 둘 사이의 차이를 명백하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전자는 단순히 인간적인 믿음이요, 후자는 신적인 믿음이요,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믿음이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이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그 믿음이며, 그 믿음을 위해서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상에서 지적한 것은 분명히 본 강해서 저자와 독자를 깊히 탐사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우리를 철저하게 비추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진 "믿음"의 성격을 진지하고 열심히 달아보도록 할 것임에 틀림없다.

흥미 있는 글이라 하더라도 주의깊은 자기 성찰을 하도록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 글을 읽는 것은 별 유익이 없다. 구약 성도들의 성공적인 믿음을 보고 놀란다 할지라도, 그 성도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같은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 달라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울부짖게 하지 않는다면, 그 놀람은 별 유익이 없다.

우리의 믿음이 단순한 자연 상태에서는 낼 수 없는 역사를 발하지 않으면, 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이기고"(요일 5:4)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다면, 우리 믿음이 "하나님의 선택자들의 믿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중대한 우려를 가질 충분한 이유가 된다(딛 1:11).

그러므로 다윗처럼 울부짖어 간구하라.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26:2). 그렇다고 해서 어느 그리스도인이 완벽한 믿음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말은 아니다 - 오직 주 예수님만이 완전한 믿음의 삶을 영위하셨다.♥

그러한 완전한 믿음의 삶을 이 땅에서 영위할 수 없는 첫번째 이유는, 다른 모든 영적인 은혜들과 같이 믿음의 삶도 성장한다는 점이다(살후 1:3). 그리고 이 지상에서는 완전히 장성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

둘째로, 믿음이 언제나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또 그 믿음의 활동을 우리가 명할 수도 없다. 믿음을 부여하신 분이 역시 믿음을 새롭게 하신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믿음 생활을 할 수 없는 세번째 이유로, 모든 성도의 믿음이 때때로 비틀거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엘리야나 여러  사도들도 그러했다. 여전히 우리 속에 육체가 존재하며, 불신앙의 생각이 언제나(하나님의 은혜로 제어하지 않으면) 믿음의 활동들을 방해하려고 벼르고 있다.

그러니 독자들더러 완전한 믿음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지 탐사해 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믿음이 장성한 상태에 있는지, 그 믿음이 언제나 일관성 있게 행사되는지, 그 믿음이 목표점에 도달했는지 살펴보라고 강권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우리 믿음이 종교 교육을 통해서 익힌 믿음보다 더 우월한 것인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불신앙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할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영적인 뿌리에서 나온 것이 명백한 어떤 열매를 산출하는 믿음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한 다음 이제 사라의 믿음을 언급한다. "남편과 아내가 믿음의 동역자로서 같은 멍에를 메고 한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아버지요, 사라는 신자들 속에서 같은 약속과 동일한 고통과 시련을 함께 나누는 자로 천거된다. 사가랴나 엘리사벳에 대하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항상 같이 있는 삶의 반려자가 같은 믿음을 가진 동료일 때 큰 힘을 얻는다.♥ 이 점은 아내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여자는 마땅한 보필이 될 수 없다. 짝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무분별한 것처럼 가정 내의 종교를 부패시키는 것이 없다"(T. Manton).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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