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68]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68]

En Hakkore 2024. 6. 3. 11:18

아브라함의 삶 4(히 11:9,10)

아브라함이 "장막에 우거" 하였다는 것은 그의 마음의 성향을 지시해 준다. 믿음의 삶은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두는 삶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에 속한 열매 중의 하나는, 지상에서 얻는 분깃이 적음에도 만족해 하는 것이다.

믿음은 약속된 것들을 신뢰케 하며 기뻐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침착한 심령을 갖게 하고 주의 뜻에 복종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지상에서 조금만 가져도 만족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에 있는 많은 것들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는 권면에 주목하는 것보다 탐심에서 마음을 건져 줄 것이 없으며, 시간과 감각에 속한 멸망하는 것들을 향하여 부리는 욕심으로부터 우리를 더 잘 건져낼 것이 없다.

또한 그 권면을 주목하는 것보다 가련한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에서 우리 마음을 더 잘 건져낼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구절을 인용하는 것과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면 아브라함의 본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각들이 죽임을 당하였는가? 우리는 불평 없이 순례길에게 주어지는 삯을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어려움을 참고 있는가(딤후 2:3)?

족장들의 장막 생활은 그들의 순례길의 성격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땅의 "표면" 위에서 살아가는 것만도 만족하게 여겼음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장막은 기초가 없으며, 짧은 시간 내에 칠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우거하면서 그 장막의 뿌리를 깊게 박지 않고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지나갔던 것이다. 그들의 장막 생활은 그들이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났음을 말해 준다. 세상의 정치나 세상의 친구들이나 종교에 대하여 구별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아브라함의 "장막"을 언급할 때, 아브라함의 "제단"을 역시 언급한다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8).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 13:18).

이 구절들 속에 나타나는 "순서"를 유심히 주목해 보라. 거룩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구별" 되어야 함을 발견한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는 우리의 번역문보다 훨씬 더 강조적이다. "장막에 거하였으니". 성령께서는 먼저 행동을 강조하지 않고, 그가 거한 거처가 "장막" 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구절에서 이삭과 야곱을 언급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거의 1세기 동안 그러한 생활을 계속했다는 부가적인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가 85년 동안 가나안에서 산 다음에야 야곱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거기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배운다. "우리가 일단 믿음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맡겨 드렸을 때 거기에는 다른 어떤 대안이나, 다른 어떤 나뉨이나, 다른 어떤 분쟁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온전히 그 분만을 따라야 하며, 전심으로 따라야 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J. Owen)

우리는 지상 생애를 다 끝마치기까지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배우게 된다.♥

여기에서 이삭과 야곱이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함께 있었음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기보다는, 그들이 가나안에서 동일한 순례자의 삶을 영위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우거하면서 어떠한 소유도 가지고 있지 않았듯이 그들도 그리하였다는 것이다.

"더불어" 라는 말은 9절 상반절에서 언급된 모든 것을 다 관장하는 말로써, 아브라함의 아들과 손자가 아브라함이 보여준 본을 따른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지시할 수도 있다.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이 점을 확증한다.

그들은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사람들이다. 그 표현은 실로 두드러진 표현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아들들은 "단순하게 후사들"이지 자기들의 부모들과 함께 하는 후사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삭이 아브라함으로부터 그 약속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각각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약속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세기 13:15; 17:8과 26:3; 28:13; 35:12을 비교해 보면 이 점은 명백히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락에 함께 참여하려면 그의 믿음의 자취를 따라 행해야 함을 말해 준다.

9절 마지막 소절에서 확대된 원리는 매우 복되면서도 탐사적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동일한 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 가족들이며 같은 그리스도와 연합했으며, 같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람들이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행 4:32), 그들은 같은 법으로 다스림을 받는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히 8:10). 그들은 이 땅 위에 살 때 다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영화롭게 하려는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부르심을 받아 같은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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