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67]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67]

En Hakkore 2024. 6. 3. 11:17

아브라함의 삶 3(히 11:9,10)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이 말씀의 강한 요지는 창세기에 있는 두 진술들을 함께 연결시켜 보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땅에 거하였더라"(12: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3:14,15).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존했던 터였다. 곧 거짓말 하실 수 없는 그 분의 명백한 말씀을 아브라함은 믿었던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 약속을 의지하여 안돈을 찾았고, 그래서 그는 그때 그 땅에 거하였던 가나안 사람들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그 땅을 자기에게 주시겠다고 서약하신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여호와께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그 땅은 "좋은 땅" 이라는 주님의 확증을 가지고 있던 바로 이 땅에 올라왔던 정탐꾼들의 경우와는 얼마나 다른가, 그들의 보고는 이러하였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아브라함이 갈대아를 떠난 것도 믿음으로 떠났듯이, 그의 본래의 고향을 떠나서 머문 것도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점은 우리가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하나님께 온 사람을 복종시키는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믿음으로 '살라'는 부르심과(갈 2:20) 보는 것으로 하지 말고 믿음으로 행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고후 5:7).

지금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장소는 여기서 "약속의 땅" 이라고 표현된 곳이다. 가나안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표현한 것은 믿음의 활력을 불어넣은 것이 하나님의 약속임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훗날 모세와 여호수아가 바로 이 방편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을 깨우치는 것을 주목해 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 6:3).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좇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수 23:5).

"외방에 있는 것같이".

이 표현은 아브라함이 그때 가나안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던 그 땅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말해 준다. 또한 그 자신이 그 땅에서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그는 거기서 하나의 농토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또한 집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땅의 백성들과 협약을 맺지도 않았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 사람들과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사실이다(창 14:13).

그러나 그것은 외인으로서 맺은 것이지, 그 땅에서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맺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땅을 자기의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 땅의 정치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그 땅의 종교와도 상관하지 않았으며, 그 땅의 백성들과 조금도 사회적인 교류를 갖지 않았다.

오히려 믿음으로 살았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발견했다. 이 점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이 세상에 있지만 그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세상의 우정을 계발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약 4:4).

그는 세상을 필요에 따라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 빠지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면서 깨어 항상 기도하고 있어야만 한다(고전 7:31).♥

"우거하여"(장막에 거하여).

이 말씀은 가나안에 있을 때의 아브라함의 삶의 방식과 마음의 성향 모두를 알려 준다.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관점에서 이 말씀을 숙고해 보기로 하자.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차지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행동했다. 그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라고 고백했다(창 23:4).

그는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인내한 모본을 보여 주었다. 그가 어떠한 땅을 거기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근사한 저택을 지을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또한 꽤 그럴듯한 위치에 정립할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세기 13:2는 "아브라함이 육축과 은금이 풍부해졌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하라고 그를 부르신 것이 아니다. 주님의 임재를 누리지 못하는 궁궐은 텅빈 초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누리는 자가 들어 있는 감옥은 하늘의 현관문과 같을 수 있다.♥

악한 이교도들에 둘러싸여 외방에서 사는 아브라함이 강하게 요새화된 성을 쌓는 것이 지혜롭지 않았을까? "장막"은 공격을 당했을 때 전혀 손 쓸 수 없다. 아, 그러나 "주의 천사가 자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주위에 에워싸 그들을 건지신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고 신뢰하였다.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관심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그 믿음을 통해서 모든 난제와 위험과 이 세상의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영혼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척하면서도 하나님의 의향에 따라 잠잠히 우리의 세상적인 관심을 단념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헛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믿음의 지독한 시련을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속하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체하면서 자신을 속인다. 자기들은 그렇게 믿는다고 상상한다. 자기들은 영원히 구원받았다고 상상하면서도, 자기들에게 관계되는 세상적인 일에 대하여 어떤 시련을 받게 될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이 믿음에 부합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마땅한 방식으로 신뢰하는 방밥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일관성 있게 행동했다"(J. Owen).♥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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