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62]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62]

En Hakkore 2024. 6. 2. 09:15

아브라함을 부르심 5(히 11:8)

앞에서 지적한 것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이미 성취된 사실을 살펴본 것이다. 법적으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상"에 속해 있지도 않고 "육체" 가운데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이 점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실제로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그것이 활용되어야 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빌 3:20). 우리는 여기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이기 때문이다"(약 4: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4,17).

그와 같이 아직도 우리 속에 있는 "육체"에 고삐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은 최고 절대적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상기시켜 주신다. "너희 몸을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그러므로 주님은 "무릇 내게 온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그 요구에 반응해야 될 것을 성경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의 요건들은 "우리의" 마음들에게도 해당된다. 옛 생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세상에서 실제로 구별되는 것"은 절대적이다. 이 점은 옛적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역사 속에서 모형적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애굽(세상의 모형)에 정착해 있었다. 어린 양의 피 아래 들어왔을 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가나안은 하늘의 모형), 그들은 바로의 땅을 떠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증자에 대하여 역시 그렇게 말씀하신다.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 2:15). 지체들은 머리를 본받아야 한다. "육체"를 실제로 죽이는 일은 동등하게 필연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영혼이) 영으로써 몸의 행싱을 죽이면 살리니(영혼이)"(롬 8:13).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이 구절을 창세기 12:1에 비추어 읽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애정의 최상의 자리를 요구하셨음을 의미함이 분명해진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자기의 뜻에 의해서 규제당해서는 안된다. 자기 사랑이나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는 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로부터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범사에 그를 다스리고 지도해야 한다. 이후부터 그는 땅에는 "본향"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하늘에 있는 본향을 찾고 그 본향으로 인도하는 길만을 걸어야 한다.♥

중생 또는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은 "이적적인" 일로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처럼 본성의 힘으로는 미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점이 위에서 언급된 바로 인하여 매우 명백해졌다.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자신을 개별적으로 계시하실 때, 초자연적인 은혜의 교통을 수반한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열매를 산출한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과 본토를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나아간 것은 육신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어긋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본성의 차원에서 동등하게 위배된다.

신적 은혜의 이적이 그 속에서 일어나야만 진실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중생의 경우들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드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들이 굉장히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을 닮은 사람이 불과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점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우리 주위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수천의 사람들 속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지하고 아브라함의 행사를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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