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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52]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52]

En Hakkore 2024. 6. 1. 20:05

노아의 믿음 1(히 11:6,7)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11:6,7)

이제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구절들은 결코 쉽지 않은 구절들이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목회자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을 강하게 강조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크게 무시하는 곳, 특권들은 강조되고 의무들은 거의 게을리 여겨지는 곳에서는 많은 성경들을 바른 관점에서 보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피조된 인간의 책임성을 비난하거나 그 인간의 마땅한 도리에 대한 것을 거의 기각시켜 버리는 말을 들어왔던 사람들이 히브리서 11:6,7의 어휘들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대면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것들을 자기들의 신학 체계에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 신학에 무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뚜렷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흔히 교파주의적인 선입관에 조금이라도 얽매인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적 정의들과 신조들의 틀 속에 꿰어 넣기에는 너무 많은 국면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 독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다루는 부분이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기이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 이 구절들에 대한 몇 가지의 질문들을 제기해 보도록 하자.

만일 믿음의 역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하나의 공로라는 의미인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라는 진술을 비추어 볼 때 그 개념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상"은 어떻게 순전한 은혜로 구성되는가?

다음 구절의 교리적 의미는 무엇인가? 노아의 경우가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을 가르치는가? 만일 방주를 짓는데 그처럼 많은 대가와 노고를 치르지 않았더라면, 그와 그 집이 홍수를 피했겠는가? 그가 "의의 후사"가 된 것은 그가 순종하여 드린 땀으로써 얻어진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정당하게 피할 수 있는가? 우리가 강해해 나갈 때, 바로 이 질문들을 염두해 두고 해나갈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에는 삼중적인 요소가 있다. 처음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등이다.

첫번째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회심을 말하는 것이고, 두번째의 경우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거듭되는 일이다. 세번째의 경우는 그가 죽거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의 일어난다.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추구하고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싶은 소원을 말하며, 이 세상에 살 때 그의 복을 받으며 오는 세상 가운데서 그의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요 14:6; 히 7:25). 그러나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

어떠한 사람도 자기들의 타락한 조건을 의식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오지도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성령께서 먼저 그 영혼 속에서 죄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했음을 인식해야 한다(엡 4:118).

탕자처럼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눅 15:18)라고 진정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으며, 그의 은총 밖에 있으며, 그의 의로운 정죄 아래 있음을 느껴야 한다.

같은 원리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관련해서도 작용한다(벧전 2:4).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함과 모든 완전한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 그 분을 구하게 만드는 것은 궁핍함에 대한 의식이다. 또한 거룩한 의무를 수행하면서 하나님과 계속적인 교제를 행한다.

모든 경건의 실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하는 일을 통해서 교사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간다. 기도를 통해서는 은혜 베푸시는 자로서의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찾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먼저 그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둘째로, 그의 풍성함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가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만물의 근본'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의미한다. 또는 "최상의 존재"가 계심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사와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 하나님을 바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상상하는 허상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이 선언하신 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이 최고의 주권자이시며, 흠 없이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조금도 하자 없이 의로우시며,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쌍한 죄인들을 향하여 궁휼과 은혜에 있어서 풍성하시다고 선언한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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