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54]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54]

En Hakkore 2024. 6. 1. 20:06

노아의 믿음 3(히 11:6,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사도는 이제 6절에서 말한 것을 예증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 시대의 세상을 다루신 방법은, 모든 세대의 세상을 어떻게 다루실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본과 표증이었다. 하나님은 부지런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시니, 그는 역시 자기를 멸시하는 모든 자들에게 복수하시는 자라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하나님께서는 옛 사랑을 멸망시키실 때 죄에 대한 불쾌하심을 보여 주셨다(욥 22:15, 16). 노아를 보전하심을 통해서는 자기 자신의 백성들의 특권들을 명백히 나타내셨다(벧후 2:9). 베드로후서 3:6,7을 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서약'이요 '모형'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구절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세 가지 요점이 들어 있다.

첫째, 노아의 믿음과 그 믿음이 의지했던 터가 나타난다. 곧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경고가 그것이다.

둘째로, 그의 믿음의 효과들이다. 곧 내적으로는 "두려움"의 생각이 일어나게 됐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법궤를 만드는 순종의 행동을 행한 것이다.

셋째, 그의 믿음의 귀추들, 곧 그의 집이 구원받고, 세상이 정죄당하고,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요점들을 거론하기 전에 이 구절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난제를 대면하여 제거하도록 하자.

그 난제는 이렇게 지적될 수 있다. 노아가 자신의 행위로 구원 받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 아니오라고 두 대답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디 인내하면서 다음에 말하는 것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숙고하길 간절히 바란다. 제발, 이단의 소리라고 일축해 버리며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기 바란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면, 홍수 속에서 멸망당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니 그를 그 큰 홍수에서 주지 않더라도 지켜 준 것이 그 자신의 노력이었다는 말인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보전하시는 능력이 그렇게 했다.

그 방주는 닻도, 돛도, 배를 조종하는 조타기도 없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운 손만이, 그 부서지기 쉬운 나무조각으로 만든 배가 바위와 산에 부딪쳐 부서지지 않도록 보존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렇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편"을 사용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에 의해서 그 방편들이 그를 보존하는 데 효력을 내게 되었다. 농부가 밭에서 땀을 흘려야 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많은 추수를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내가 위생법을 지키고 건전한 식품을 먹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복주실 때만이 나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영적인 일에도 그러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시고 미리 지정해 주신 방편들을 사용할 절대적인 필요성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노아가 홍수로부터 잠시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이 임박할 진노로부터 영원토록 구원받을 것을 것에 표증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모형은 정확하고 안전하다.

아무리 현학적인 체하면서 교묘한 말로 꾸며 말한다 할지라도, 노아가 방주를 지은 것 - 그 일은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른 주도적 면밀한 일이었다! -은 그가 보존받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제거할 수 없다. 그러니 노아의 경우가 행위로 구원받는 분명한 실례를 보여 주는가?

다시 우리는 담대하게 예, 아니오라는 대답을 모두 제시한다. 그러나 노아가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기 전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었다는 점을 명심해 두면 그 난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창 6:8,9을 참고하고 6:14,22을 비유해 보면 그 점은 틀림없이 명백해진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앞 문단에서 말한 모든 것을 전복시켜 버리지 않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구원은 지나간 것일 뿐 아니라(딤후 1:9), 현재와(빌 2:12) 미래적인 것이기도 하다(롬 13:11)!. 우리가 이 구절을 강해해 나감에 따라서, 그 난제의 해결책이 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전에 지적한 바와 같이, 히브리서 11장의 처음 세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믿음의 중요성과 탁월성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그런 다음에 4-7절에서는 믿음의 삶에 대한 개요가 소개되어 있다.

믿음의 삶의 시작이 4절에서 밝혀져 있다. 5절에서는 믿음의 삶의 내용의 성질이 밝혀져 있다. 또 6절에서는 경고와 격려가 주어져 있다. 그리고 7절에서는 믿음의 삶이 결국이 어떠한가를 묘사한다. 믿음의 삶이 도달하는 영광스런 목표점에 이르기 전에, 7절은 우리에게 5절에서 말했던 것의 또 다른 국면을 보여 준다.

거기서 우리 믿음이 죽음의 세상보다 훨씬 높이 고양되고, 그 믿음의 은총을 입은 사람의 마음이 하늘로 승화됨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대적과 위협과 시험의 장소이다. 그래서 7절에서는 믿음이 어떤 것을 성취하느냐 뿐 아니라, 믿음이 "어떻게" 그것을 성취하느냐를 보여 준다.♥

히브리서 11:4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과 4장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하며, 11:5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3장과 4장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하며, 11:5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5:24을 참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듯이 지금도 우리는 여기에서 예표된 것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 창세기 6장을 살펴 보아야 한다.

독자는 창세기 6:5-22로 돌아가 보라. 거기서 우리는 엄격한 하나님의 판단이 공표된 것을 발견한다(13절). 또한 여호와의 보시기에 "은총을 입은" 사람에게 제시된 구원의 방식(14절), 심판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마땅히 필요한 믿음의 순종(14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주신 방편(15절) 등을 발견한다. 그러한 방편들을 사용함으로써 구원을 얻었다.

이제 같은 방식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가장 엄숙하게 경고하며 공표되었다(살후 1:7,8; 벧후 3:10-17). 이 두 대목의 말씀들이 전부 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서신들에서 발견됨을 독자는 유심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히브리서 11:7은 5절부터 영적으로 밝혀진 것의 다른 측면을 보여 준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히브리서 11:7이 "균형 있는" 진리를 담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5절의 신비적인 개념에 착념하여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사단은 언제라도, 5절의 아름다운 이상을 우리에게 밝혀주나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설교자들을 위해서는 가능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늘에 속한 것만을 생각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매일 이 지상에서 행해야 할 의무들이 있단 말이예요. 우리가 5절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편은 수도원이나 들어가는 것이겠지요. 또는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전적으로 이격시키는 수밖에 없어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점을 요구하지 아니하실 리 없어요". 그것은 "암흑시대"의 큰 실수였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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