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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43]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43]

En Hakkore 2024. 5. 30. 16:20

아벨의 믿음 3(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여기서 세 가지 요점이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아벨의 행동의 샘(믿음), 그의 예물의 성질, 바로 그 점에서 아벨의 것은 가인의 것보다 탁월하였다. 이것들 중 첫번째 사항을 우리는 이미 생각해 보았다. 이제 둘째 것을 검토해 보겠다. 이 히브리서 11:4의 어투는 창세기 4장을 되돌아 보게 한다. 창세기 4장에서 이런 말씀을 읽게 된다.

"아벨은 자기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4절). 여기서의 그의 행동("드렸더니")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던" 창세기 3:8의 그의 부모들의 행동과는 퍽 대조를 이룬다. 그 대조는 매우 의미가 있다. 아담과 하와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도망쳤다.

그러나 아벨은 궁핍함의 의식을 가지고 주님을 찾게 되었다. 그 둘 사이의 차이는 양심과 믿음의 작용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안한 양심은 결코 그 자체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9).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창 4:4). "기름"이라는 말을 따라 언급한 것은 어린 양이 살해되었음을 말해 준다. 어린 양을 살해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아벨은 최소한 다섯 가지 사항을 인정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사람을 쫓아내신 일이 의로웠음을 인정했다(창 3:24).

둘째, 그는 자기가 범죄한 죄인이며, 마땅히 죽어야 할 자로 인정했다.

셋째, 하나님은 거룩하며 죄를 심판하셔야 함을 인정했다.

넷째, 하나님께서 긍휼에 풍성하사 자기 대신 무죄한 대속자의 죽음을 기꺼이 받으심을 인정했다.

다섯째, 어린 양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열납될 것을 내다봄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는 그 양의 첫 새끼의 피를("장차" 또는 "만물의" 머리 되시는 분을 상징하고 있음 - 골 1:15) 그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공의 사이에 놓았다. 여기서 믿음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먼저 나는 죄인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한 자요, 그러므로 마땅히 율법의 "저주" 아래 있어야 하며,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의로운 선고를 공손히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핑게댈 것이 없으며, 내보일 공로가 없으며, 정당하게 형을 감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내가 아무리 선하게 행한다 할지라도 그 선행이 자기 사랑에서 나와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촉진시킬 목적으로 행해졌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넝마조각에 불과하다. 나는 죄인임을 솔직히 고백하고 수치로 내 얼굴을 가리울 뿐이다.

은혜의 복음이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내 상한 양심에 적용될 때 소망이 생긴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의 선고에 순복하며, 스스로 잃어버린 자요 자기들의 죄 때문에 자신들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이 살도록 죽으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리실 때, 그때 믿음은 떨리는 손을 뻗어 구속주를 붙잡고, 그 범행자는 용서함을 받으며 하나님께 열납된다.

아벨의 제사의 성격을 숙고하였으니 이제는 어떤 점에서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더욱 탁월한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창세기 4:3에는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그렸다"고 하였다. 가인은 전혀 불신앙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그의 제사의 성질을 면밀히 주목함으로써 네 가지 사항을 관찰할 수 있다.

첫째, 그 제사는 피 없는 제사였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둘째, 그것은 땅의 열매에 불과하였고, 그가 수고한 소산에 불과하였다.

셋째, 그는 의도적으로 창세기 3:17의 "땅은 저주를 받았다"는 하나님의 선고를 무시했다.

넷째, 그는 창세기 3:21에 알려진 은혜를 멸시했다.

그래서 가인은 첫 "외식자"가 된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부합하기를 싫어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나타남으로써 자기의 배역을 숨기려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그는 자기의 경우가 너무 절망적인 나머지 마땅히 자기가 죽어야 하며 다른 자가 대신 그 죽음을 당하면 피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추구했고 하나님께 선심을 쓰는 척했다. 바로 이것이 유다가 말한 "가인의 방식"이었다(유 11절).

그것은 자기 의지의 방식이요, 불신앙과 불순종과 종교적인 위선의 방식이다. 아벨과 얼마나 대조를 이루는가! 그럼으로써 인간 역사 초기부터 지상에 있는 교회가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혼합체"임을 결정적인 예표로서 발견하게 된다.

가인과 아벨은 두 대표자로서 우리 앞에 서있다. 그들은 두 머리이다. 종교계내에서는 바로 그 두 부류의 사람들만이 발견된다. 그들은 기독교회의 두 부류를 아주 그럴듯하게 모형화시켜 주고 있다. 가인은 창세기 4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상징으로, 입술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큰 무리들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요구사항들을 듣기는 싫어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또한 예배자인 척 하지만 미움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은 "적은 떼", 자기들의 죄인 됨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부응함으로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열납된 사람들을 예표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 에 대한 두드러진 실례를 가장 엄숙하게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 둘 다 "불의 가운데 조성되고 죄 가운데 잉태되었다". 왜냐하면 둘 다 타락한 부모들의 타락한 아들들이었고, 에덴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악인에 속했고(요일 3:12),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의 수에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권적 은혜는 인간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며, 가장 그렇듯한 자가 아닌 온당치 못해 보이는 사람에게 머무른다는 사실을 귀하고 가장 복되게 본다.♥

두 사람 중 더 어린 아벨은 그 존영에 있어서는 열등한 자였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너는 저를 다스릴지니라"(창 4:7)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은 외면적 특권들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셈은 야벳보다 앞세움을 받았다(창 5:32; 10:2, 21). 이스마엘보다 이삭이, 에서보다 야곱이 은총을 받았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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