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Hebrews 18] 본문

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18]

En Hakkore 2024. 5. 29. 14:50

사도들의 운명 1(히 10:28 -31)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10:28~31)

우리가 살펴보려는 구절들은 26절에서 시작된 대목을 끝마친다. 이 대목의 요지는 사도들의 운명이다. 이 본문은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배도자들의 죄에 대한 묘사와, 그들이 받을 심판에 대한 선언의 말씀으로 나누어진다.

엄숙한 강조를 위해서 이 부분이 각각 거듭 되풀이된다. 26절에서 그 죄 자체가 언급되었었다. 26절 마지막 소절과 27절에서는 그 죄에 대한 심판이 공언되었다. 28절과 29절에서는 모세의 법으로부터 끌어낸 논증을 통해서 앞에서 언급된 심판의 공정함을 확증한다.

사도는 모세의 법을 들어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죄의 무서운 성격을 보여 주고 있다. 30절과 31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들고 나와 그 심판의 확실성을 확증한다.

그처럼 엄숙한 주제를 되풀이 말하는 것은 사려깊은 독자에게 외경심을 자아내기에 좋을 것이며, 그런 독자의 양심과 마음에 가장 탐사적인 효력을 발생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앞의 여러 강론을 통해서 지적하였듯이, 이 대목(26-31절)이 사도에 의해서 도입된 것은 22-24절에서 발견되는 권면, 곧 그리스도인들더러 경건의 상태와 실제를 계속 견지해 나가라고 촉구하는 요지의 말씀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대목은 두 극단에 속한 신학학파에 의해서 크게 왜곡되었다. 한 학파는 중생한 사람들이 은혜에서 떨어져 영원히 타락할 수 있다는 자기들의 거짓된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대목을 잘못 사용했다.

그 문제를 더 깊게 취급하지 않고도 히브리서 10:26-31절은 알마니안들의 주요주장을 직접 지원하는 말씀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대하는 것은 순전히 가정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짐짓 죄를 범하면" - 곧 우리가 의도적으로 온전히 기독교 신앙고백을 버린다면 - 성령께서 중생한 히브리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배도했다든지 또는 배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심을 명심해야 한다. 유사하면서도 보다더 요점적인 경우가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서 발견된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요 8:55).

이 대목을 오해했던 부류들 가운데 지혜롭다기보다는 열심을 더 많이 가진 칼빈주의자들이다. 그들 거의 대부분은 알미니안들을 대적하여 자기들의 터를 유지시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26절의 영역에 전혀 들어오지 않음을 보여 주는데 온 힘을 다 써버렸다.

26절은 다만 머리로 진리를 아는 지식만 가지고 있는 외양적인 신앙고백들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저 입술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큰 원수는 하나님의 참된 종들 가운데 몇을 얻어 이 엄숙한 구절의 날카로운 날을 무디게 하는 데 성공하였고, 성도들의 양심을 탐사할 능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사도가 여기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으며(3:1), 10:26의 "우리"라는 말에 그 자신도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하면 이 이론은 충분히 논박당하게 된다!

우리는 현대 '세대주의자들' 의 세번째 이론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유대인들 외에 어떤 사람들도 여기서 언급된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확언한다. 심지어 성경에 있는 그러한 하찮은 것을 강해하느라고 지면을  낭비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난제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진술할 수 있다. 참으로 중생한 사람들이 멸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째서 성령께서는 사도를 감동시켜 그들이 배도하게 되면 당할 치료할 수 없는 운명을 가정적으로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이겠는가?

그러한 난제가 야기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한쪽으로 치우친 개념으로 인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만 존재하는 자로서 생각하고, 그가 여전히 그 자신 속에서 어떠한 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는다.

그가 그 스스로 인격을 지닌 존재라는 후자의 경우를 명심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부인하거나 최소한 무시하는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많은 성경구절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이 이중적인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롬 8:30). 그럼에도 그는 틀림없이 그 자신 속에서는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했다! 여기 히브리서 10:26에서는(다른 많은 대목들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있지 않고, 여전히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자로 보고 있다. -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권면뿐 아니라 엄숙한 경고를 받을 필요가 있다.

다시, 한 쪽 측면만 생각하는 참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이 주제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원한 뜻과 지혜롭게 정해진 방편을 통해서 그 뜻을 면밀히 인식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가장 피상적으로).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믿든지 아니 믿든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논증하셨다면 그가 그리스도를 믿든지 아니 믿든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렇지 않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은 명백히 그 반대를 증거한다 - '목적'과 '방편'은 불가분의 관계로 함께 연합된다.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을 구원으로 인도하기로 작정하실 때 틀림없이 그에게 구원얻는 믿음을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진리이다. 그러나 그 말이 성령께서 그 사람 대신 믿어 줄 것을 결코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믿음을 반드시 '행사'해야 한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모든 중생한 영혼마다 안전히 하늘나라로 이끌림받도록 정해 놓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음을 끝까지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방편을 사용하든지 아니하든지간에 모든 중생한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정해 놓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함을 입는다"(벧전 1:5) - 거기에 인간적 책임의 국면이 존재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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