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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히브리서 강해 (An Exposition of Hebrews)

[Hebrews 2]

En Hakkore 2024. 5. 28. 16:09

하나님께 나아감 2(히 10:19-23)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2절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 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요 14:6).♥
여기서 "성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늘을 의미하는 또 하나의 명칭이다. 여기서 그렇게 부른 것은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가 하늘에 대한 예표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9:24의 말씀을 통해서 확증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10:29과 9:12의 말씀을 서로 연결해 보면 참으로 복되다.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하늘에 있는 성소에 그의 몸에 속한 지체들이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은,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대로 들어갈 권리를 갖게 된 것과 같다!

여기 10:19의 본문에서 언급되는 "성소에 담대하게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나 구세주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에 들어가는 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지금 가지고 있는 영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그렇게 담대히 나아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서 얻어지는 조건들 사이의 엄청난 대조를 주목하게 된다. 유대교 아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엄격히 규제당했다.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그들에게는 엄격히 차단되어 있었다.

아니, 장막에서 섬길 특권을 받았던 레위인들조차도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 언약의 복락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 권리가 주어져,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아뢸 수 있고, 예배자로서 그의 전에 들어가 행복한 자녀들처럼 그의 식탁에 앉아 먹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점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의 끝에서 그리스도가 아주 복되게 밝히고 있는 요점이다. 거기서 우리는 탕자가 '스스로 돌이켜'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리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그는 일어나 갔다. 자 그가 어디까지 갔는가? 문 밖에인가, 아니면 창문으로 들여다 보았는가? 아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권적인 은혜는 그에게 '들어갈' 담대함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들어 가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자기 죄를 고백한 다음 화해의 '입맞춤' 을 받고 '가장 좋은 옷' 을 받아 입었고,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그 영광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 이 되었다.

그 비유 속에서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과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씀이 여기 히브리서 10장에 나타나 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그의 법을 기록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죄와 불의를 "다시는 기억지 않겠다"고 공언하신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본문 속에 나타나는 "그러므로" 라는 말의 강도를 여기서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만족한 제사로 말미암아 모든 법적인 장애가 제거되었고, 그리스도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그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으니만큼(골 1:12),

이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을 막고 선 것은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충분한 이유와 동기가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서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토해 낼 충분한 근거를 얻게 된 것이다.♥

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는 초청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여기 10:19-22에서는 보다 특별하게 "예배" 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곧 예배와 교통의 장소인 "지성소" 로 들어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민 7:89).

"담대함" 이라는 말에 대하여 몇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 한다. 사피어(Saphir)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하였다. "이 표현은 '객관적으로 이해되어야지 주관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주관적으로 이해된다면 그 다음에 오는 권면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다른 말로 해서 여기서는 우리 밖에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으로, 헬라어는 "형제들아 그러므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가졌으니" 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들어갈 권리" 를 가진 것으로 번역했다.

아마 그 말은 옛 언약 아래서 사람들이 처한 여러 상태들에 대한 이중적인 대조를 지시하기 위해서 주어진 말일 것이다. 옛 언약 아래 있던 사람들은 여호와가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율법적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처소에 들어갈 완전한 자격을 얻었다.

다시, 유대교에 속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무서웠다'. 반면에 지금은 우리가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지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이다(엡 1:6). 온전한 영의 해방감으로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기가 거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예수의 피로".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성소" 에 들어갈 권리를 얻게 된 공로적인 원인이다.♥ 그 성소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모든 표증이 드러나는 곳이다(9:3, 4). 유대교에 속한 제사들의 피는 그처럼 하나님의 면전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예수의 피는 그런 일을 했다. 하나님께 제사드려야 하는 면에서도 그러하고, 그 제사를 신자들에게 적용시킴으로써 그 신자들의 양심에 끼치는 영향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면전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해방감을 얻게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하나의 제사 또는 섬김의 의무로써 하나님과 신자들 사이에 있는 모든 법적인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여러 요구사항들을 성취했고, 그 율법의 저주를 제거했으며,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그 증표로 구주께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반으로 갈라졌다. 또한 성령께서도 피의 효력을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적용시킴으로써 그들은 이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데서 자유로워졌고, 해방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Arthur W. Pink 히브리서 강해 II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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