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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74]

En Hakkore 2024. 5. 23. 16:08

난제와 반론 3

이사야 5장 1~4절을 살펴보면서 똑같은 원리를 좀더 설명해 보겠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 구절을 볼 때, 하나님은 자신이 더 나은 대가를 기대하기에 충분할 만큼 -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 이스라엘에게 행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하나님이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라고 말씀하실 때, 상징적인 표현 양식을 사용하고 계시는 것도 똑같이 분명하지 않은가? 하나님이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고 말씀하실 때도 똑같지 않은가?

우리는 그분이 행하신 세세한 부분들이 - 망대를 세운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외적인 특권과 수단과 기회를 말할 뿐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은 원하셨다면, 이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은 제거하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 23장 37절에 기록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통과 누가복음 19장 41절에 기록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눈물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을 연결해야 한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주님이 어떤 상황에서 우셨는지 알 수 있다.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눅 19:42-43).

그리스도께서는 무서운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고 계셨으며, 그분이 예루살렘을 보며 우신 이유는 이 심판을 내다보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눈물이 하나님의 실망을 나타냈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눈물은 하나의 완전한 인간을 보여주었다.♡

인간 그리스도 예수는 감정이 없는 금욕주의자가 아니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분이셨다. 그분의 눈물은 그분의 참되고 순수한 인간됨에서 나오는 죄없는 동정심을 표현했다. 만약 울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인간 이하였을 것이다. 그분의 눈물은 그분이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을 보여주는 많은 증거 가운데 하나였다.

1장에서,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랑하신다고 했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많은 사람이 이 말에 분개하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이제 우리가 하려는 말은 우리가 이 책에 했던 그 어느 말보다 큰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확신에,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바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자들에게, 이제 우리가 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부지런히 살펴보라고 요구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한다면, 이것이 이 시대에 가장 인기있는 신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신념은 모든 계층에게 아주 인기가 높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이 신념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엡 1:13; 딤후 2:15 참조).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만인구원론(Universialist), 단일신론자(Unitarian), 신지론자(Theosphist), 크리스천 사이언스 교도(Christian Scientist), 심령술사(Spiritualist),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등이 가장 좋아하며 이들에게 근본적인 교설이다.

이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 하늘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며, 하나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자기 영혼의 영원한 유익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며, 저주를 하며 죽어가더라도 -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아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겠다는 소망을 거의 품기 힘들 정도다.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신념은 아주 현대적인 젓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 교부들이나 종교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의 글에서 이런 개념을 찾으려 해봐야 헛수고다. 19세기에 이러한 개념을 대중화하는 데 어느 누구보다 크게 기여한 사람은 아마도 D. L. 무디(D. L. Moody, 1817-1899)-드루몬드(Drummond 1581-1897)의 '세상에서 가장 큰 것'(The Greatest Thing in the World)에 매료된 -일 것이다.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말하는 게 관습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미한 구분이다. 죄인 속에 죄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죄인의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사 1:5-6)게 사실이지 않은가?

하나님이 자신의 복된 아들을 멸시하고 거부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게 사실인가? 하나님은 사랑일 뿐 아니라 빛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죄 가운데 있는 그에게 거짓된 안정감을 줄 뿐더러 그의 양심에 화인을 찍는 짓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도들만을 위해 있으며, 이 사랑을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주는 것은 자녀의 떡을 빼앗아 개들에게 던지는 짓이다(마 15:26 참조).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제외하면, 사복음서에서 완전한 선생이신 주 예수께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곳은 하나도 없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와 메시지를 기록한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쓴 서신서에 이르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귀한 진리에 대한 표현이 넘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하여, 신자들에게 주신 진리를 불신자들에게 적용하는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자. 죄인들이 대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거룩과 엄격한 의와 흔들림 없는 공의와 무서운 진노이다.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 나라의 모든 전도자와 설교자에게 말하고 싶다. 오늘날 신앙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죄인들에게 너무 지나치게 많이 제시하는 반면에, 죄인들에게 그들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적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자신이 완전히 파괴되고 잃은 바 된 상태에 있으며, 다가올 진노를 당할 임박하고 무서운 위험에 처했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서운 죄값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죄와 다름없어 보인다.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는 게 사실이라면, 왜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요 14:21. 23)라고 말씀하셨는가?

아버지께서 모두를 사랑하신다면 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리고 성경은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시 5:5)라고 말한다. 단순히 악한 행위를 미워하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는 이 시대의 가르침을 완전히 거부한다. 성경은 말한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시 5:5),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날마다 분노하신다"(시 7:11, KJV 직역).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 위에 머물 것이다.'가 아니라 지금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또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39)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와 대상이 제한적임을 보여주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또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 9:13)는 말씀으로 볼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은 다 사랑하시지 않으시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히 12:6)는 말씀도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가족으로 제한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하나님이 예외 없이 모두를 사랑하신다면, 여기서 언급한 구분과 제한은 전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다. 하나님이 불못에서 영벌을 받는 자들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을 지금 사랑하신다면 그때도 사랑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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