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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 (The Sovereignty of GOD)

[하나님의 주권 47]

En Hakkore 2024. 5. 21. 18:04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

인간 의지의 본성

의지란 무엇인가?의지는 선택 능력이며, 모든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선택은 필연적으로 하나에 대한 거부와 또 하나에 대한 수용을 암시한다. 선택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마음에 긍정(선택)과 부정(거부)이 다 제시되어야 한다.

의지의 모든 행위에는 선호, 즉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 선호가 없고 완전한 무관심만 있는 곳에서는 아무 결정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의지한다는 말은 선택한다는 뜻이다. 선택한다는 말은 둘 이상의 대상 중에서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결정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의지는 주권적(독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의지는 그 무엇의 종이기 때문이다. 의지가 주권적인 동시에 종속적일 수는 없다. 의지가 원인인 동시에 결과일 수는 없다.

의지는 선택의 출발점이 아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했듯이, 그 무엇이 의지로 선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이 진정한 원인자이다. 선택 자체는 여러 고려 대상의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대인에게 미치는 다양한 영향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정은 이러한 고려사항과 영향의 결과이다. 이것이 결과라면, 결과는 이것들의 종이 분명하다. 의지가 이것들의 종이라면 의지는 주권적이지 않다. 의지가 주권적이지 않다면, 의지의 절대적 자유를 단언하지 못한다.

의지의 행동은 저절로 일어나지 못한다. 의지의 행동이 저절로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원인 없는 결과를 가정하는 꼴이다. 무는 유를 낳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인간 의지의 절대 자유나 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의지가 자기 결정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치켜뜰 수도 있고 내려 깔 수도 있다. 이때 지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이, 의지가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말이다.

이 경우는 내가 완전히 무관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하나를 다른 것보다 선호해서 선택한다고 가정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둘 다 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지성은 선호하는 게 생길 때까지 아무 관련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다.

정확히 이때, 의지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관심이 사라진 순간, 선택이 쉬워졌다. 무관심이 선호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에, 의지가 대등한 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논증은 허물어진다. 우리가 말했듯이, 선택은 하나에 대한 수용과 나머지 하나 또는 여럿에 대한 거부를 암시한다.

의지로 선택하게 하는 그 무엇이 의지를 지배한다. 의지가 지배를 받는다면, 지배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무엇이 의지를 지배하는가? 우리는 의지에 작용하는 가장 강한 동기력이라고 대답한다. 이 동기력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경우는 이성의 논리가 동기력이고 어떤 경우는 양심의 소리가 동기력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감성의 충동이 동기력이고 어떤 경우는 유혹하는 자의 속삭임이 동기력이다. 또 어떤 경우는 성령의 능력이 동기력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든 개인에게 가장 강한 동기력으로 작용하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의지로 행동하게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의지의 행위는 결정을 자극하는 경향이 가장 큰 지성의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지성의 상태는 하나님뿐 아니라 세상, 육신, 마귀에게도 영향을 받는다.

방금 한 말을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분석해 보자. 주일 오후에 아픈 아이를 심방하기로 한 어떤 목사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게 심한 두통이 생긴 것이다. 그는 아픈 아이를 심방했다가는 자신의 상태가 악화되어 저녁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었다. 그 목사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째는 자신이 아플 위험을 감수하면서 환자를 심방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후에 휴식을 취하고 산뜻하게 일어나 저녁 예배를 드리고 다음날 심방하는 것이다.

무엇이 그 목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정보를 주었는가? 그의 의지였는가? 전혀 아니다. 사실 최종적으로 의지가 선택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의지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도록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앞의 경우, 여러 고려 사항이 서로 모순되는 선택의 동기들을 제공했다. 이러한 동기들이 개인에 의해, 그의 감성과 지성에 의해 균형을 이루었다. 한쪽을 뒷받침하는 동기가 다른 쪽을 뒷받침하는 동기보다 강했고, 그에 따라 결정이 이루어졌고, 의지가 행동했다.

한편으로 환자를 심방해야 한다는 측은지심을 느꼈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강력한 동기가 그의 지성에 적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판단력은 그에게 몇 가지를 상기시켰다. 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휴식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환자를 심방하면 상태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면 그날 밤에 말씀을 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다음날, 주님의 뜻이라면, 환자를 심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오후에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목사에게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의무감 더하기 동정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기 필요 더하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었다. 그날 밤에 강단에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후자가 이겼다. 영적 고려가 의무감보다 강했다. 그가 결정을 내리자 의지가 그 결정에 따라 행동했고, 그는 휴식을 취했다.

이 경우를 분석해 보면, 지성이나 추론 기능이 영적 고려의 지배를 받았고, 지성이 의지를 규제하고 다스렸다는 게 드러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의지가 지배를 받으면, 의지는 주권적이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못하며 지성의 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유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해야 하며, 의지가 자신에게 미치는 동기에 종속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럴때에야, 우리는 주 예수에 관한 두 성경 단락 사이에 아무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4장 1절은 "그 때에 예수께서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1장 12~13절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라고 말한다. 알미니안주의의 의지 개념은 두 구절을 절대로 조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 두 구절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몰아내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강제적인 동기나 강력한 자극, 곧 저항이나 거부가 불가능한 동기나 자극을 통해 광야로 나가셨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끌리셨다는 말은 그분이 자유롭게 광야로 나가셨음을 암시한다.

둘을 함께 놓고 보면,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몰아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인간 의지의 자유와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이 결합했다. 죄인이 그리스도께 이끌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분께 나오는 것이다.

이끌림은 저항할 수 없는 동기를 부여하며, 나옴은 의지의 반응을 상징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몰리고 인도되셨다.♡

Arthur W. Pink 하나님의 주권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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