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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143] 여리고성에서 얻은 승리(수 6:1-27)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143] 여리고성에서 얻은 승리(수 6:1-27)

En Hakkore 2024. 5. 20. 11:27

동료 사역자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를 알려 주시는데도 여러분이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렇게 물은 때가 없었는가? 그때 그가 "아들아, 오늘 가서 내 포도원에서 일하거라"고 따뜻하게 대답하지 않았는가?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 전부를 그분을 섬기는 일에 다 쏟아 부으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일에 온 정력을 기울이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선히 그 일을 행하는 중에 낙심하지 말기 바란다. 넘어지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면 정한 때에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조급해도, 주님은 절대로 서두는 법이 없으시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하나가 그 정해진 기간이 있다. 긍휼 자체도 그렇거니와, 그 긍휼의 시기도 똑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그것은 우리의 뜻에 달린 것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속히 오게 할 수도, 더디 오게 할 수도 없다.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고"(사 28:16), 오히려 꾸준히 그날의 임무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실망하여 넘어져서도, 일을 속히 처리하고자 우리 자신의 수단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침들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과, 그 일에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신뢰와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것이다. 인내가 그 일을 온전히 이룰 것이다.

여기 이스라엘이 그랬다. 여리고의 성벽들이 첫째 날이나 둘째 날에, 심지어 다섯째 날이나 여섯째 날에도 전혀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았고, 자기들 나름대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켰던"(시 37:34)것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시 37:7)는 것이야말로 이 사건을 통해 제시되는 위대한 교훈이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그분의 능력에 의지하고, 전적으로 그분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을 기다리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통해 지침들을 주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만 했다. 그러니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들로서 순종하면, 신자들로서 기대감을 갖고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미래에 대해 열정적으로 기대하면서도 현재에 하나님의 뜻에 온유하게 복종해야 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시편 37:34).

"여호와를 바라고" 기다리지 못하는(욕심이 넘치는 육체로 인해서) 것이 "그의 도", 즉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결과물을 얻으려고 지나치게 서두는 자는 하나님이 지정해 주시지 않은 "지름길"을 취하기 마련이다.

그처럼 거룩하지 못한 조급함으로 행동하는 자는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천천히 인내하면, 그가 지정해 주신 그 방법을 그대로 고수하게 될 것이다.

설교자나 평신도나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49:23)는 약속을 붙잡아야 하겠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수 6:15).

그들의 믿음과 순종과 인내가 정말 컸다! 하루에 한 번씩 아무런 효과도 없이 여리고 성을 돌기를 엿새 동안이나 계속했는데, 이제 일곱째 날에도 그 똑같은 일을 행해야 했고, 게다가 한 번도 아닌 일곱 번씩이나 그 일을 행해야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라는 문구를 주목하기 바란다. 절차에 변화가 없어야 했다. 눈에 실패처럼 보인다고 해서 다른 수단을 취할 명분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지침들을 끝까지 철저하게 준수해야 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시험이 계속 지루하게 이어진 것은 물론 점점 더 가혹해졌다. 하루에 한 번씩 엿새 동안 행했는데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일곱째 날에는 여섯 차례나 더 돌았는데도, 하나님이 개입하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인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쉽게 지쳐버리고 속히 실망에 빠져버리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거듭하여 나타나는 것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말씀할 필요가 있다. 일곱 제사장, 일곱 나팔, 칠일, 그리고 일곱째 날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는데, 여기에 의도와 의미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존 오웬(John Owen)의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장 훌륭하다고 본다.

"하루 한 번씩 엿새 동안 그 성 주위를 돌고난 후 일곱째 날에 그리로 들어간 일은 창조의 역사에 관한 일이었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세우시거나 지으신 일이 없는 그런 유례없는 새로운 정착과 엄숙함의 길에서 그의 안식에(이는 그 분을 예배하는 일에 관한 것인데) 들어가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흔히 그 안식을 가리켜 '그의 안식'이라 부르신다(시 95:11; 132:8, 14; 히 3:11; 4:3, 11).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안식과 결부되며, 그의 안에서 신자들의 안식과 연결되는 새 창조의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수고와 일곱째 날에 얻은 상급에 준하는 것을 주고자 하신 것이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