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가상칠언 26] 고난의 말씀 7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26] 고난의 말씀 7

En Hakkore 2024. 5. 16. 12:27

고뇌의 말씀(The Word of Anguish)

5. 우리 구원의 기반이 되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간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에 어떠한 죄든지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길 기뻐하셨다. 그래서 무한하신 지혜로 의가 충족될 수 있는 길을 생각하셨고 자비가 범죄한 죄인들에게 풍성히 넘쳐흘렀다.

바로 대속의 길이며 의인이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었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대속물로 선택되었다.

나훔을 통해 이 질문이 제기되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1:6). 주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스러운 인격 안에 그 답이 있다. 그만이 홀로 "설"수 있었다.

오직 한 분만이 그 저주를 견딜 수 있었고, 저주를 딛고 승리자로 일어날 수 있었다. 오직 한 분만이 그 모든 복수의 진노를 참아내고, 의의 법을 찬미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었다. 오직 한 분만이 사탄에게 발꿈치를 상하시고도 죽음의 능력을 가진 사탄을 멸망시킬 수 있으셨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시 89:19), 여호와의 동력자, 영광의 광채, 하나님 본체의 형상이신 분을 붙드셨다. 그러므로 끝없는 사랑, 확고한 정의, 전능하신 능력,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믿는 자들의 구원을 가능케 하셨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사악함은 그리스도께 옮겨졌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게 떨어졌다. 형벌이 주 예수께 옮겨졌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속죄하셨고, 속죄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달린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합당한가라는 의문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위해서 흘려진 것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위해서도 흘려진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러므로 이것은 애굽에서 뇌리에 각인된 유월절 그 밤에 이미 예시되었다.

양의 피가 하나님의 눈이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저주의 죽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저주"란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날에 그의 왼편에 선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마 25:41)라고 하실 말씀에서 명백하다. 저주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이런 뜻을 담은 이야기가 구약에 수없이 많이 있다. 매해 대속죄일이 되면 수송아지를 죽여서 피를 흩뿌린 후에, 그 잔해는 속죄소 앞에서 진 밖으로 내어다가 버려 태운다(레 16:27).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진의 중앙이었다. 진 밖으로 버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쫓겨나는 것이었다.

문둥병자도 마찬가지였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레 13:46). 문둥병은 죄인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진 밖으로 쫓겨났다. 또한 '구리뱀'의 예표도 있다.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아 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셨을까? 뱀을 그리스도의 예표,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보라! 뱀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은 맞지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지셨다"는 것을 상징한다. 뱀은 저주의 상징물이기 때문이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구약의 전조들을 이루셨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단절되어 "성문 밖에"(히 13:12) 계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심으로 "문둥병자"와 같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구리뱀"처럼 되셨다.

그러므로 가시면류관의 깊은 의미는 바로 저주의 상징이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높이 들리심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감당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한 죽음의 장막이 땅을 뒤덮었던 암흑의 세 시간이 가지는 의미를 나타낸다.

스펄전 목사가 말했듯이 "대낮에 한밤중이었다." 월식도 없었다. 유명한 천문학자는 십자가 처형이 있던 시간에 달은 태양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절규는 마치 어둠이 이 비통한 절규의 의미를 알려 주듯이 어둠의 의미를 알려 준다.

오직 한 가지만이 이 어둠을 설명할 수 있듯이 오직 한 가지만이 이 절규를 해석할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죄인과 잃어버린 바 된 자들을 대신하셔서 죄를 지시고 그의 백성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견디시며 죄를 모르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죄를 삼으셨다."

이 절규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려 준다. 그것은 속죄의 명시였다. 왜냐하면 셋(세시간)은 항상 명시를 의미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자연적인 징후이다.

구속자는 죄인의 죄를 지고 홀로 남겨졌다. 이것이 세 시간 동안의 암흑에 대한 설명이다. 죄인이 불못에서 이중고, 즉 육체의 고통과 상실의 고통을 겪듯이 그리스도도 쏟아지는 하나님의 진노와 더불어 하나님의 임재와 교통이 사라지는 고통을 당하셨다.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설명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는 나의 대속물이었다. 하나님은 나를 구주와 하나로 인정하셨다. 그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다.

그는 나의 허물을 인하여 찔리셨고, 나의 죄악을 인하여 상하셨다. 죄가 제쳐진 게 아니라 제거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서 죄를 심판하셨기 때문에 믿는 죄인들을 그 아들 안에서 용납하신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골 3:3).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내쳐졌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 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진 저주들은 당연히 우리의 몫이었다. 그의 복된 머리에 굴복한 폭풍은 이제 영원히 잠잠하다. 그의 머리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들려 있고, 나에게는 하나님의 평안이 주어졌다.

여기에 우리 구원의 기반이 있다. 우리의 죄는 값이 치러졌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충분히 만족되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잠시 버림받음으로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모든 믿는 영혼들은 고백하라. 그가 끔찍한 어둠 가운데 들어가셔서 내가 빛 가운데 걷게 되었다고, 그가 진노의 잔을 드셔서 내가 기쁨의 축배를 들게 되었다고, 그가 버림받아서 내가 사함을 받게 되었다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