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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칠언 16] 사랑의 말씀 2 본문

가상 칠언, 그 의미와 적용

[가상칠언 16] 사랑의 말씀 2

En Hakkore 2024. 5. 14. 11:38

사랑의 말씀(The Word of Affection)

2.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의 모범을 세우신 완벽한 사람이셨다♡

주 예수는 하나님께든지 아니면 사람에게든지 유지하고 있던 모든 관계의 의무들을 온전히 수행하시면서 완벽한 몸가짐을 보여주셨다. 십자가 사건 속에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부드러운 배려와 염려가 보인다. 모든 자녀들이 따라야 할 본이 있고, 자연과 은혜와 법에 따라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 가르치신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이 두 개의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신 말씀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있는 한 그것은 유효하다. 각각의 계명은 신약에서 통찰력 있는 가르침으로 구체화 되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은 에베소서 6장 1-3절에 반복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물론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말하고 있지만, 그저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가 있다. 사랑과 애정, 감사와 존경을 포함한다. 또한 너무나 자주 이 다섯 번째 계명이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진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계명은 우선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자녀들은 처음에는 어린아이들이다. 그러나 유년기만 벗어나면 이 계명의 효력이 다한다는 결론은 최소한 그 심오한 의미의 절반은 잃는 것이다.

"공경"이라는 말은 그 속뜻이 보여 주듯이 우선적인 의미인 순종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시간이 흘러 어린 자녀들이 자라 성인 남녀가 되면, 모든 것을 홀로 책임지고 더 이상 부모의 통제를 받지 않는 나이가 되지만, 부모에 대한 의무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다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부모를 높이 받들고,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존경하는 것이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의 완벽한 예에서 순종과 존경이 드러나고 있다.

처음 아담이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또 완전한 성인의 몸과 정신으로 이 세상에 온 것과는 달리, 마지막 아담은 아기로 탄생하셔서 유년기를 겪으셨다는 사실이 이 다섯 번째 계명에 시사해 주는 중요성과 가치가 대단히 크다.

유년기에 소년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와 법적인 아버지 요셉의 통제를 받았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2장에 잘 드러나 있다.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되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에게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간다. 자세히 관찰해 본다면 이 장면은 깊은 시사점을 준다.

유월절이 끝날 무렵, 요셉과 마리아와 친구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출발하면서 예수가 동행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왕의 도시에 남아있었다. 하루를 꼬박 가고 나서야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즉시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한다.

어머니는 그에게 묻는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

그녀가 "근심하여" 예수를 찾았다는 사실은 예수가 어머니의 영향권 바깥으로 나간 적이 그녀에게는 낯설고 생소한 경험이었고, 요셉의 도움을 받아 "근심하여" 찾았던 사실은 고향 나사렛에서 모자간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드러낸다.

즉시 사태를 파악한 예수의 대답 또한 어머니께 가지고 있었던 공경하는 마음을 보여 준다. 나는 그리스도가 어머니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는 캠벨 모건(Campbell Mogan)박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것은 올바른 강조점을 찾는 문제이다.

"어머니는 알지 못하셨습니까?" 모건이 훌륭하게 설명한대로, "이것은 '어머니, 하나님 아버지의 일 외에는 절 붙들어 놓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아실 정도로 절 잘 아시잖아요' 라는 말과 같다." 그 다음 구절도 역시 아름답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그렇게 항상 그리스도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본이 되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시던 시기는 끝났다.

그러나 "공경"의 시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땅의 삶에서 마지막 처절한 시간에 십자가 위에서 극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주 예수는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어머니를 생각하셨다. 당장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을 생각하셨고, 자신의 사랑을 가장 깊이 이해한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여 어머니의 미래를 준비시키셨다.♡

그 순간 마리아를 생각하신 것과 그녀에게 보여 주신 공경은 고통을 넘어선 승리의 표현이었다. 주님이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복음서의 기록에는 "어머니"라고 부르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주님은 전지하신 예견력으로 몇 세기를 내다보시면서, 곧 일어나게 될 끔찍한 우상숭배를 알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어떤 단어 사용도 자제하셨다.

바로 그녀의 아들에게만 돌아가야 할 경의를 마리아에게 돌리는 우상,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숭배하는 우상이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여자"로 부르신 것을 복음서에서 두 번이나 발견한다. 두 번 모두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인데, 요한복음은 잘 알려져 있듯이 구주의 신성을 말한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설명하지만, 네 번째 복음서는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는 모든 인간 관계를 초월하므로, 여기에서 주 예수께서 마리아를 "여자"로 부르는 것은 완벽한 일치이다.♡

십자가 위에서 마리아를 사랑하는 제자의 손에 맡기신 우리 주님의 행동은 어머니가 과부였다는 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죽음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없지만, 주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어느 시점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가 열두 살 소년이었을 때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사건 이후에 마리아의 남편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요한복음 2장에서 마리아는 가나 혼인 잔치에 나타나지만, 요셉이 참석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애정 어린 근심은 마리아가 과부이기 때문이었고, 예수께서 함께 계셔서 그녀에게 더 이상 위로가 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권고의 말을 하겠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수많은 장성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을 수도 있다. 당신은 부모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공경"하고 있는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모범을 보면서 부끄럽지는 않은가?

당신은 젊고 혈기왕성한데 당신의 부모는 머리가 희어지고 기력이 쇠할지도 모른다. 성령님은 말씀하신다.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 당신은 부유하고 부모는 가난할 수 있다. 그렇다면 꼭 그들을 도우라.

부모가 먼 지역이나 타국에 사는데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하는 걸 잊을 수도 있다. 그 말은 그들의 말년을 환하게 해준다. 이것은 거룩한 의무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Arthur W. Pink 가상칠언 그 의미와 묵상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