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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62] 체험적 연합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연합과 친교 62] 체험적 연합

En Hakkore 2024. 5. 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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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러 가지 의식(儀式)과 수단과 특권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 우리 영혼의 주된 목표인 참되고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 즉 공적 예배를 드릴 때,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 묵상하고 기도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와 영적 교제를 나눌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자유롭고 친밀한 교제가 우리의 뚜렷한 추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구약성경에서는 이 진리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성막이나 성전에서 그의 전 생애를 보낸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의식적인 교제를 하며 그의 완전함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제 한 가지 난점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은 아름다운 이상이지만 그러나 슬프게도 내가 처해 있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혀 실천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생활고에서 벗어난 사람들, 그리고 자기들과 그 부양가족들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세상에서 투쟁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들에 의해서 실천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이 경건한 묵상과 영적 번영을 위한 시간과 여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나같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주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신을 다루시고 있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방법은 대단히 오묘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무한하신 사랑의 영원하신 약속에 대해 생각해보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가 보기에 지극히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일지라도 자비와 진리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그는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렘 32:40)고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로지 바로 그 언약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고 깊이 숙고하며 간구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강화될 것이고 당신은 주 안에서 승리할 것이고 당신을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하박국의 믿음을 상기해 보라.

즉 그가 이르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합 3:17-19)라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 선지자는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설령 표면에 나타난 모든 일들이 외관상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된다 할지라도 그렇지만 우리는 기쁨에 넘치는 소망을 가지고 말씀대로 성취되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단순한 믿음으로 모든 것을 주의 손에 의탁하면서 당신 자신과 모든 관심사를 주께 맡기는 것이 당신의 지혜요 위로가 될 것이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리로다".(시 55:22).

우리는 다른 독자들이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세적인 환경이 제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나의 고민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데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행복한 교제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토록 타락하고 내부가 썩어 있고 영적으로 병들어 있고 모든 일에 있어서 비참하게 실패한 자가 어찌 영광의 주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중생한 수많은 영혼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실제적 문제이다.

오늘날의 자기만족에 빠지고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며 교만한 자기 기만에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죄 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의 고통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연약한 가운데 있으면서 신음하는 동료가 당신에게 '길르앗의 향유'를 환기시키려고 애쓰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스도는 죄에 시달리는 영혼과 더불어 교제를 계속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오만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도다"눅 15:2)라고 불평하였다. 그들이 영적인 것돠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자들과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교제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사고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일 이 책이 그들의 많은 후계자들의 손에 들어갈 때에 그들의 저주를 증오하지 아니하고 그 교훈이 '위험하다' 또는 '반법주의적이다', 그리고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라고 비난하지 않게 된다면 대단한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로 동요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의 시인과 칭찬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에 '백성이' 그리스도 말씀을 '즐겁게' 들은 것과같이(막 12:37), 오늘날 영적으로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아주 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