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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48] 구원에 이르는 믿음 2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연합과 친교 (Spiritual Union and Communio

[영적인 연합과 친교 48] 구원에 이르는 믿음 2

En Hakkore 2024. 5. 9. 17:50

우리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며 그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일의 근거는 바로 생명의 새로움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소생시키시는 일이다. 죄인이 중생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부끄러워하지 않을 소망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그가 생각하고 추리하고 말하고 자연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있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듯이, 영혼과 그리스도 사이의 생명적 연합도 우리가 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생명적 원리가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믿음의 생명적 행위를 발휘할 수 있다. "무릇 1) 살아서 나를 2)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6)라는 말씀 속에 나타난 순서를 주목해 보라. 영적 생명의 전달이 믿음보다 선행함을 믿는 자는 거의 없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또한 그는 거기에 들어갈 수도 없다. 은혜의 초자연적 사역이 그의 마음에 이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왕국의 성격과 그것의 최상의 탁월함 혹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고, 이 하나님의 '이끄심'은 먼저 그가 영적인 죽음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에 있다.♡

은혜의 기적이 일어날 때, 그 은혜를 받은 대상은 여전히 전과 똑같은 인격이지만, 그는 위로부터 그에게 부어진 영적 생명의 원리로 인하여 '새로와' 졌으며 그는 이제 새로운 경험과 행동에서 나오는 새로운 바램과 갈망을 소유하게 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권리)를 주셨으니"(요 1:11, 12). 그리스도께서 유대나라에 나타나셨을 때 그 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그를 받아들였던' 사람이 있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서 받아들였고 자기 마음과 생활의 주인으로서 받아들였으며 완전히 충분한 구주로서 받아들였다. 그러면 이들은 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는가?' 그들의 의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덜 완고해서였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은 바로 다음의 구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즉 이는 ['그를 받아들인' 사람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설명이 있겠는가! 즉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먼저 하나님에게서 난 자들이다.♡♡

죄인이 구원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자기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에 대하여 깨닫고 자기에게는 구주가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또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실" 때이다(빌 1:6).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로부터 살리심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께로 참되이 나아올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또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40)하는 그리스도 자신과도 일치한다.

만약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 오려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생명이 있어야 한다. 그들은 나아와야 하며 나아오도록 값 없이 초대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논증이나 설득으로도 그들로 그렇게 하도록 이끌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은 귀먹은 자의 둔감한 마음에 떨어지고만 실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 이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셔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그들의 신학이 성경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들의 체험으로부터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보다는 자기의 감각이 증명해 주는 것에 따르기를 더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자기의 필요에 대한 감각과 자기의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깨달음, 그리고 자비를 하나님께 구하며 스스로 부르짖는 일, 또 스스로 그리스도께 돌아서는 일이다.♡

그가 깨우침을 받고 자기의 죄를 깨닫기 전에 자기 안에 있는 성령의 살리시는 사역이 있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것의 실체를 인정하는 데 매우 더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최후에 호소해야 할 곳은 '법과 증거'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훨씬 전에 우리는 이미 육체적으로 (어머니의 태내에서) 살아있지 않았던가?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즉 그 생명의 인식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

초자연적인 대상은 초자연적인 믿음을 필요로 하며 이 초자연적 믿음은 자연적 인간은 전혀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주 예수를 구원에 이르도록 믿을 수 있으려면 먼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영적 생명을 나누어 주셨어야 한다.♡

"이 믿음은 마음이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 다른 진리에 동의하는 것처럼,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의 자연적 행위일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행위이며 은혜의 성령의 능력으로 생기게 된 결과이고 그 믿음의 대상의 성격에 합당한 실행을 불러 일으키는 진리의 설득이다. 그것은 구세주의 말씀에 마음으로부터 찬성하면서 충심으로 그를 시인하는 것이며, 선지자이고 제사장이며 왕으로사의 그의 전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다"(J. 딕).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