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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10] 신성의 연합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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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연합과 친교 10] 신성의 연합 3

En Hakkore 2024. 5. 6. 09:40

(장문^^)
하나님이 삼위에 대하여 다른 곳에서보다도 복음서 안에 더 명백하게 계시되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구약의 성도들이 이 거룩하고 기초적인 진리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럴리가 없다.

만약 그들이 그 진리를 알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알거나 하나님께 이성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려면 계시되어져야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실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각 위(位)가 알려져야만 한다.

구약의 성도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분명한 복음적 지식을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복음이 신약시대에 와서, 특별한 것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난제를 알게 된다. 이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히브리서 4:2에 단언하기를 "저희 즉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와 같은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다." 히브리서 3장 후반부를 보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갈라디아서 3:8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신성 안에 있는 삼위에 대한 영광스러운 진리는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자주 명백하게 나타난다. 성경의 맨 첫 페이지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나타난 복수 대명사는 분명 신성 안에 한 위 이상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구약 성경 중에서 창세기 1:26에서만 하나님에 대한 복수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창 3:22)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3:5은 뱀이 한 말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으로서 아마도 그것은 비꼬아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된다. 다른 것은 다음에서 볼 수 있다.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라고 말했던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에 대하여 주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자"(창 11:7)라고 하셨다.

또 다른 경우에 이사야에게 보여 주신 놀라운 환상 속에서 볼 수 있다. 거기에서 그는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던" 장면을 보았는데, 그분 앞에서는 천사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또한 그 선지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하시는 주의 목소리를 들었다. 삼위일체 속에 하나님의 일체와 일체 속의 삼위를 암시하는 '나' 와 '우리'라는 대명사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 안에 계시는 여러 위를 묘사하면서 진리의 영이 사용한 것과 같이 삼위의 각 위가 서로에게 말할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이 복수 대명사를 사용했다는 것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창조주가 되시는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은 창세기 1:26에서 말씀하셨고(엡 3:9 참조), 모든 심판을 위임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서 창세기 11:7에서 말씀하셨으며, 성령은 이사야 6:8에서 말씀하신다.(행 18:26을 보라, 13:2 참조).♡

다음의 각 구절에서 히브리어 명사는 복수로 되어 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시 149:2).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히브리어의 대구법에 의해서 '거룩하신 자들'은 '여호와'에 해당되는 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확실히 민수기 6:24-26의 기도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암시가 많이 나타나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또한 이사야 6:3에서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한 말 속에서도 볼 수 있다. 이사야 48:16에서, 우리는 메시야가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이제는 1) 주 여호와께서 2) 나와 3)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볼 수 있다.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그리고 내가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 있더라"(겔 43:5,6).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찬양하고 있었을 때에, 성신께서 그를 안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으며 그 옆에는 그에게 지시하였던 그 자가 서 있었다. 그런데 40:3에는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선지자는 신성 안에 있는 삼위의 환상을 보았고, 그 삼위가 그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았다.

신성 안에 있는 여러 위의 복수성은 다음의 구절들 속에서 암시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게 내리셨다"(창 19:24),
"여호와께서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시 110:1),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슥 3:2).
"그러나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이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학 2:4,5).

신성한 삼위의 제 1위는 구약 성도들에게 아버지로서 알려져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입증할 만한 많은 구절이 있으나 그 중에서 다음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사 64:8).

삼위의 제 2위는 아들로서 계시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시 2:7). 또한 말씀으로 계시되었다. 즉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다"(시 33:6). 그리고 창세기 15:1과 근본적이고 개인적인 '말씀'이 보여지는 열왕기상 19:9을 보라.

삼위의 제 3위는 성령, 즉 "여호와의 신"(삼상 16:13)으로서 제시되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사 41:21,22).

그것은 참으로 주목할만한 구절이다. 그것과 비교될 만한 것은 다음 구절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할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한다"(사 57:15)

"지존무상한 자"는 곧 하나님 본체의 분리할 수 없는 일체 안에 있는 자이고, "영원히 거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이 되는 것이며,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는 아버지와(왕상 8:27) 아들과(렘 23:24-26을 보라) 성령의(시 139:7,8) 실상이며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며"는 아버지와(고후 6:16, 18) 아들과(골 1:27) 성령의(시 110:1) 실상을 묘사한 말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아버지에(시 110:1), 아들에(렘 23:6), 성령에(삼하 23:2) 적용되는 것으로, 항상 복수 형태가 없이 하나님 본성의 일체를 나타내는 단수로 쓰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 대명사와 복수 동사들과 함께 복수 '엘로힘'(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자주 쓰여짐을 본다.

그런데 이것은 신성의 본체 안에서는 하나이지만 동시에 복수로 또는 삼위로 존재하시는 여호와라고 모든 성경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문법의 규칙에 맞을 수가 없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그 본질의 일체성 안에 삼위로 존재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과 전혀 다르고 완전히 구별된다는 이 사실에 우리가 혼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여호와 앞에 마음 속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신 6:4). '일신론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바로 이 구절은 우리가 여기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거룩한 진리를 반대하여 신성 안에 삼위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전혀 의미가 없는 구절이다.

'하나는 하나이다'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계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구절이 바로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것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엘로힘'(하나님)이 복수인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신성을 계시할 때에 삼위 하나님은 한 '주', 또는 여호와라는 사실을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위는 크신 한 분이라는 이 신비를 (다소라도) 이해했다는 것은 아론이 유일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백성들이 그것을 복수로 취급했던 사실로 보아서 아주 분명해진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Arthur W. Pink 영적인 연합과 친교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