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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기도 26] 제5장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기도 (Effectual Fervent Prayer)

[영적인 기도 26] 제5장

En Hakkore 2024. 5. 2. 12:39

베드로전서 1:3-5(II)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송영의 찬미를 계속하여 살펴보면서 이 장을 시작하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성부 하나님을 중보자와 그 중보자 안에서 택하신 자들의 언약적 머리로서 보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독특한 기독교적 칭호가 붙게 된다(엡 1:3 보라).

이 칭호는 그를 구속의 하나님으로서 설명해 준다. 그에게는 "많으신 긍휼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완전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다른 모든 속성들처럼, 이것을 그 자신의 주권적 의지로써 발휘하신다(롬 9:15).

성경은 하나님의 이 탁월성에 관하여 많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긍휼"(눅 1:78)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다윗은 "주의 인자가 크사"(시 86:13), "주는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라고 말하고 있으며, 느헤미야는 그의 "여러 가지의 자비들"(느 9:27)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 속성에 대하여 명상하고 그것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라.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7)고 그는 말하였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07:1). 그러므로 각 신자들은 시편 기자와 함께 "나는 ...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시 59:16)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잘못에 빠진 성도들은 특히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하며 이 속성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반적 자비와 특별 자비는 구별되어야 한다

일반적 자비와 특별 자비가 있음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이 차이는 필요 불가결한 것이고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불쌍한 영혼들이 믿음으로써 후자에 의지하기보다는 전자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

이 세상에 참으로 많은 악이 충만해 있음을 생각하면서, 통찰력이 있고 죄를 깊이 뉘우치고 있는 마음은 시편기자와 함께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시 119:64)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시된 이 일반적인 자비와 그의 택함받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 사이의 차이를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인 그리스도의 탁월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우리 조상에게 약속된 긍휼"(눅 1:72)이라고 불리어진다. 시편 기자는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시 108:4; 엡 4:10 참조)라고 참으로 적절히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높임을 받으신 구세주께서 그의 구원의 사역의 열매들을 관리하시면서 지금 앉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히 9장, 특히 5, 23, 24절 보라)가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으로 괴로와하고 죄짐을 진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긍휼을 기대해야 하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자비로우시므로 어느 누구도 영원히 저주하실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탄이 수많은 사람들을 치명적으로 속이는 미혹이다. 용서하는 자비는 구세주의 속죄 피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그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다.

이 긍휼은 언약의 긍휼이므로 풍부하다

베드로가 여기에서 찬미하고 있는 긍휼은 분명히 매우 특별하고, 또 구별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긍휼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수단으로 하여)" 그의 사랑을 받는 대상에게로 쏟아진다.

우리는 이 말씀이 두 구절 사이에 즉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는 말씀 사이에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약의 긍휼, 구원적 긍휼, 중생시키는 긍휼이다. 그것은 특히 그 긍휼을 베푸시는 자를 생각해 볼 때 "그 많으신 긍휼대로"라고 올바로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 풍성한 긍휼은, 원래가 무한하고 변함이 없이 거룩하시며 그가 만일 모든 인류를 파멸하도록 내버려두셨을지라도 전혀 개인적 손실을 입지 않으셨을 스스로 충만하신 여호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은 단지 그의 선한 기쁨 때문이었다.

우리가 이 긍휼의 대상들의 성격, 즉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는 타락한 반역자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많으신 긍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우리들이 그 긍휼의 특별한 축복들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많으신 긍휼"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축복들은 사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건강, 생명을 유지케 하는 것, 보호하는 것과 같은 흔하고 일시적인 것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영적이고. 하늘의 것이고 영원한 혜택들이다.

우리가 이러한 축복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단을 생각해 볼 때 그 긍휼은 "많으신 긍휼"이라고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 못박힘을 전제로 한다.♡

"그 많으신 긍휼"이란 말만이 아버지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사 수많은 죄악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자들을 위하여 종의 형체를 하고 혈육을 가지고 말구유에 태어나게 하신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룩한 분은 자기 백성의 보증자가 되어 그들의 빚을 갚아 주고 그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으시고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여 죽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공의의 칼로써 그를 치셨으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기"(롬 8:32) 위하여 그를 저주에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 85:10)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같이, 이것은 의로운 긍휼이다. 빛의 여러 가지 색깔들이 안개와 같은 자연의 프리즘을 통해서는 나뉘어져 보이지만 언약의 증거요 상징인 무지개를 통해서는 아름답게 섞여 보여지는 것처럼(창 9:12-17; 계 4:3), 겉으로는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긍휼과 의, 사랑과 진노, 거룩과 평강의 속성들이 연합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기도 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