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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62]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62]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30. 12:22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반대 의견들 4)

"성도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자비로우시며 무한하신 은혜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들의 행위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 대답은 쉽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완전하심이 하나님의 주권 하나로 대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완전하심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다 포괄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대한 요구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은혜를 통해 구원받았다면 그는 세상적인  정욕들과 불경건을 거절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하나님의 매가 그 사람 위에 임하는 것이다.

다윗은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어떤 선행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도 역시 신약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남녀관계에 있어서 거룩해야 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그는 무서운 징계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징계하심으로써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전 11:32) 하시는 것이 곧 은혜, 거룩하고도 의로우신 은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하나의 선택받은 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아버지 집의 가족 구성원, 아버지의 교훈대로 사는 사람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 도덕적인 주체, 하나의 지배 대상, 이 세상의 지배자께 지배되어야 하는 존재로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와 그에 때른 결과 사이에 떼어낼 수 없는 관계를 설정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행위로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싫어하시는지를 그의 통치권을 통해 표현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인간이 의의 길을 걸으면 그것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상호성 원칙(the principle of gractious reciprocity)에 따라 우리에게 자신을 낮추신다는 말이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선을 자랑할 수는 없다. 그가 완전히 그리고 계속해서 순종했다 하더라도 그는 단지 의무를 다한 것 뿐이며, 근본적으로 따져 본다면 하나님께 이익을 드린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더구나 인간 자신을 용서하신 것은 값 없는 은혜이며 순전한 은혜의 행위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야 할 의무나 강요를 느끼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는 말씀과 관련하여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커다란 장애물이다"(매튜 헨리). 불신앙은 주님의 자비의 문을 닫았다고 주장한다면 이에 대해 몇몇 사람들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금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나니 이는 무서운 불경건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금지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고 우리가 극구 부인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그 대답은 쉽다. 믿음은 하나님 자신이 명하신 명령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믿음에 역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으심이 없이 거절하신다.

하나님은 불신앙을 장려하실 의무를 지고 계시지 않으며 하나님의 방법을 멸시하는 자를 칭찬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마가복음 6장은 이 점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다"(5절).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없으시다' 혹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없다'는 말씀을 할 때에는 그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심이 완전하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한갖 '목수'로만 보며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권세를 베풀어 그들의 눈을 휘둥그래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그 어떤 정식적인 목적을 실현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의  그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않으신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