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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59]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59]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30. 12:20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반대 의견들 1)

이상에서 밝힌 영적인 원리들을 증명하시기 위해서는 신구약 성경의 여러 다른 구절들을 인용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살지 않으면 분명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길을 걸을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하는 영적인 복들을 제때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세상의 의로우신 재판장을 기쁘시게 하는 길과 불쾌하게 하는 길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일하시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거스리고 계시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가 없다(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를 통해 판단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지난 날 성도들을 대신한 것과 똑같은 토대 위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을 대하고 계시며,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원리로서 그들을 대신한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성경 구절은 얼마든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많은 난제들이 해결되어지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되어진다.♡

야곱의 생애가 왜 그렇게 파란만장했었는지, 그리고 다윗과 그의 가족에게 돼 그렇게 혹독한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내려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접하게 되는 원리나 토대는 아주 새롭고 이상한 것들이다.

슬프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미소를 발견하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최상을 방해하고 빼앗아 가는 요인을 연구하고 대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말이다.

하나님의 최상을 이미 잃어버린 사람에게 그것을 회복하는 방법을 알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설교자들이 선지서의 예언을 나름대로 해석한 후, 그것을 '예증하기 위해'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화제거리를 수집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의 최상(God's best)과 같은 주제를 열심히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한 그들이 소위 '은혜 교리' 등과 같은 추상적인 논문을 설교하고, 자기 이론에 반대되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반박하는 일 대신 하나님의 최상을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슬프게도 오늘날은 진리의 실제적인 면이 경시되고 있으며 그 결과로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런 특권이 있는지조차 모르며 그 특권을 누리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생소한 것이므로 우리가 여기서 말을 맺는 것은 적당치 못하리라고 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이 비록 완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이는 아마도 해답을 듣고 싶은 질문들이 많이 떠오를 것이며 해결하고 싶은 몇 가지 난제들을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의견에 반대하는 의견과 정면으로 맞부딪칠 것이라는 예측은 당연하다. 그러나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겠다.

첫째로, 그 누구도 성경으로부터 세워진 것을 반대하여 그것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어떤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변을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린이라 할지라도 어른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와 방법에는 우리가 볼 때 항상 신비의 요소가 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유한한 자가 무한하신 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 중에 가장 지혜로운 자라 할지라도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부분적으로만' 보고 '부분적으로만' 안다. 따라서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날마다 간구하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다.(욥 34:32)

하나님의 방법에 이렇게 신비하고 심오하며 들여다 볼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어두움 가운데 버려두신다든지, 지극히 높으신 이가 그의 성도를 어떤 원리로 대하시는가에 대해 성도들은 알 수 있는 능력도 없고 방법도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판단이 "큰 바다와 일반"이고(시 36:6), 세상의 지성으로는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는 것"(시 77:19)이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은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고"(욥 12:22)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는"(단 2:22) 것이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인간의 지혜로는 "찾지 못할 것"(롬 11:33)이 분명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볼 때, 복된 사실은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게 된 것(시 36:9)이며, "그 행위를 모세에게"(시 103:7) 알려 주신 그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적지 않게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빛을 모두 다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특권이다. 그 한계 이상을 넘으려 하고 명상해 보아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불경한 일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