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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6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6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30. 12:21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반대 의견들 2) 장문♡

성도가 '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 성도를 위해 하나님은 모든 일을 예정하시고(롬 11:36), 모든 성도 개개인에게 은혜의 길과 기업을 영원히 예비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이 칼빈주의자들의 중요한 반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반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이 반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은 이 반문이 우리의 주제와는 빗나간 질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는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의무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의무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밀어낼 정도로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가 너무 하나님의 통치권을 강조하여서 인간의 의무에 대한 진리가 중성화되거나 무효화되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진리의 어느 한 측면을 이용하여 그 진리의 다른 측면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로마서 11:36과 갈라디아서 6:7은 모두 다 인정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권과 인간의 의무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설명에 한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진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지, 이성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진리를 모두 다 명백하게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두 가지 진리 사이의 '일관성'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이 진리들을 모두 다 믿어야 한다. 불평하고  반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지나친 사람들' 몇몇은 믿음을 실천하기보다 따지기를 더 좋아하는데 잠시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에게 몇 가지 빌문을 던져 보기로 하자.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삼상 23:!2). 뒤에 되어진 일을 살펴 볼 때,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도피하라고 명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이 너를 붙이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도피시키면서 어떻게 그들이 다윗을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왕하 13:19).

왕이 땅을 친 회수가 어떻게 사태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람을 '멸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셨는데 요아스의 믿음이 부족하다 해서 어떻게 그 결정이 변경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또한 엘리사의 이 말은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라는 바로 전의 약속에 대해 왕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아람에 대한 승리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성으로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적절한 딜레마가 어디 있겠는가?

사악한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의 명의로 기록한 조서에 왕으로 하여금 어인을 찍도록 꼬였을 때, 그리하여 그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이 모두 한 날에 몰살당하게 되었을 때에 이 끔찍한 소식을 들은 모르드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에스더는 내시를 보내 모르드개가 왜 그렇게 슬퍼하는지 알아보게 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조서 초본을 보내면서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고 하였다(4:8). 에스더는 다시 내시를 모르드개에게 보내며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밀어야 살 것이라"고 전언하였다.

이에 대해 모르드개는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고 회답하였다(14절).

만일 에스더의 개입으로 인해 유대인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었다면 어떻게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이 오겠으며 그녀와 그녀의 아비 집이 어떻게 멸망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인간들의 인생관을 따라 '하나님의 결정은 냉혹한 것이다'라는 편견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책임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이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성경에 나타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교훈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명령을 파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보다 우위에 선다는 뜻인가?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의 강조점을 어디에 두고 계신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다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권(주권)으로만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간과하는 행동이다. 지나친 칼빈주의자들의 균형없는 교훈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위험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그 상태를 깨닫지 못하지만 '관객'들은 그 상태를 명백히 보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이들은 운명론적 반신불수에 빠져들게 한다. 필포트(Philpot)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었다. 다음의 글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무리 절대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아름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서 편히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것은 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냐?'고 물으실 때 우리는 '예, 주님 제가 얻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매우 미묘한 것이지만, 양심이 무디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을 통해서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위로하고 내 영혼아 평안하라고 달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자급자족할 수 없고 우리의 피흘리는 상처에 길르앗의 향유를 부을 수가 없으며 위대하신 의사 그분을 우리 옆에 모셔 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 다음 순간의 우리 모습을 거절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모든 말과 행실에 있어서 열매맺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도리어 불순종과 자만으로 우리 영혼을 그르치고 삭막하게 하고 사망을 불러들여 마침내는 우리 양심을 죄로 가득하게 할 수는 있는 존재들이다"(렘 8:22에 대한 설교에서). 이 저자는 죄에 대한 응징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죄를 응징하지 않으면 선과 악의 영원한 구별이 무위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성도의 순종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무 중요성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생각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더욱 힘써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있고 필수적인 것인가에 대해 강조하면서 불순종이 야기하는 중대한 결과를 신실하게 경고하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99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