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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5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53]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29. 11:15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림 8)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지역 교회를 대하시는 주님의 원리가 각 사람을 대하실 때의 원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교회 역시 지혜롭게 행할 때는 하나님의 최상을 누리지만, 미련하게 행할 때는 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리라"(게 2:4,5).

그래서 '촛대'가 옮겨진 예는 얼마든지 있다. 무분별하게 불의와 타협하던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님은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2:16)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이 교회는 주님이 미워하시는 자들의 교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규율을 유지하지 않는 교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자랑하기 좋아하고 세속에 물든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님은 "네가 이같이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3:16) 즉 더 이상 내 증인으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교회의 성도라면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는"(고전 12:25)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해 야고보서 2:1-4을 들어 설명하던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기는커녕, '금 가락지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가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구분한다면 우리는 지금 파당을 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파당짓는 일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스스로 속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 부흥을 허락지 않으신다.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지' 않는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역경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지금 인용한 이 말은 알미니안 계통의 출판물에서 인용한 말이 아니라 미국 내의 저명한 극칼빈주의 단체(hyper - Calvinist body)에서 발행하는 한 잡지의 최근 호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우리가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교회의 지도자 혹은 성도가 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 그 교회는 '고통을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최상을 상실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계에 그런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고전 11:30). 이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리고 자기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현세적인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다.

'이러므로,' 이 말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혹은 '무가치하게' 먹은 것을 가리킨다(20,21절).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질병과 죽음이 발생하는 경우에 우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그 이유를 여쭈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그저 단순히 다스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과오를 깨닫도록 공의로 다스리셨다. '이러므로' 라는 말이 보여주는 바와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불경건과 무절제에 대해서 그들에게 육신의 병을 주심으로써 그들의 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형태의 죄라도 짓지 말라고 경고하시며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최상을 누리느냐 못 누리느냐에 따라 우리의 건강이 좌우된다는 사실도 보여주신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 절에서 그런 징계를 피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심판하시며(벧후 4:17), 성도들은 그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모든 교회와 성도 개인은 그리스도께 자기의 행위, 말, 생각 등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분은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시다(계 2:1). "그 문이 불꽃 같고"(계 2:18) 그분 앞에서 만물은 벌거벗은 것 같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그분은 죄를 하나하나 지적해 내시며 분내어 처벌하시는 분이 아닌가?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그 성도들의 잘못을 고쳐주시는 데 있어서 서두르지 않으시며 성내는 일에는 더디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집은 거룩하게 유지되고 있다.

주님은 심판하시기 전에 경고하신다. 주님이 성도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우리를 위해 당하신 것이다. 다만 그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적 징계를 피하는 길을 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성도들 중에는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가 즉시 임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릎이 약해지고 손이 늘어지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잘못된 극단이다. 위에서 말한 성경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우리를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 그리스도의 판단 원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곧 바로 재판장이신 예수님께 달려가 이를 통회하는 마음으로 자백하면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 죄를 간과하실 것이다. 우리는 회개를 외치는 요나와 니느웨의 이야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나 선지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고 외쳤을 때 이 말은 보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요나는 이 말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의 냉혹함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덕적으로 깨어나도록 경종을 울려 준 것이다.

그 '사십 일'은 그들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주는 조건이었고, 사실상 '진정으로 회개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면 구원이 임하리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슬쩍 짚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명확히 입증하고 지나가야 하겠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