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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55]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55]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29. 11:17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하나님의 최상을 회복함 1)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린 개인, 혹은 단체의 여러 예들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직면하는 곤경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도 우리에게 죄가 발견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매를 피하겠느냐 하는 점도 지적하였다.

이번에는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최상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미소를 되찾을 수 있는가? 물론이다. 가능하다. 쉬운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다시 회복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왜 우리가 가련하게도 이 역경에 빠지게 되는지를 엄숙히 반성해 보도록 하자.♡

여러분과 내가 이 역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기도에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풍성한 영적 생활을 누리기 위한 간단하고도 중요한 비결은 처음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다(골 2:6). 처음에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의 보혈의 풍성함을 신뢰하였고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심을 인정해 드렸으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고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했었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순종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기만 한다면 그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들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며 하나님의 미소가 그 안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가 얻을 행복은 없을 것이다.

만일 성도가 매일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에 게으르고 그리스도의 충만을 멀리한다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먹지 않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회수를 줄여 나간다면 그의 영적 생명의 심장 고동은 점차 약해질 것이며, 그 박동도 불규칙하게 될 것이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종종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하고, 자기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겸손을 항상 새롭게 되새기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사랑은 곧 냉각될 것이고 영적인 흥미는 사라질 것이며 순종이 그렇게도 어렵고 지겨운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이러한 영적 쇠약을 그대로 방치해 두거나 변명하며 넘어가다 보면 머지않아 은혜의 손길 대신 죄가 다시 거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마음은 점점 더 죄와 불경건으로 치닫게 된다. 전에 무가치하게 여겨 버렸던 세속적인 쾌락이 다시 유혹하기 시작할 것이다.

수단에 불과하던 세속적인 일들이 그의 목적이 되면서 점점 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고귀한 것인 양 보이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주님께 던져 버렸던 세상의 근심들은 이제 다시 그를 짓누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면서 공공연히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타락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타락한 사람의 경우는 "범죄한 일이 드러난"(갈 6:1) 사람의 경우보다 훨씬 심각하다. 왜냐하면 그의 타락은 한 번의 넘어짐이나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인 타락과 주님으로부터의 분명한 분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타락의 초기 단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주위 형제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방심과 냉담함의 암세포는 비밀히 그를 잠식하여 간다. 방종과 자만의 영 앞에 그는 항복한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자기의 타락을 발견할 때 그는 경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무시해 버린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타락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더하여 마침내는 은혜가 더 이상 작용하지 않게 하며 마귀를 대적할 힘을 잃고 만다.

이렇게 되면, 성령님은 슬퍼하시며 그의 위로와 소생케 하는 능력은 거두어진다. 타락의 정도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타락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완전히 타락한다. 그러나 성도가 그것을 분간하기는 어렵다. 타락한 사람이 안전하다고 보증하는 성경 구절이나 죄 중에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는 성경 구절은 하나도 없다. 많은 경우 그 반대일 뿐이다.

일정한 기간동안 계속해서 타락한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을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슬프다. 그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그리스도를 욕먹게 했으며 동료 그리스도인, 특히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 되어 왔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는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다. 전에 그는 하나님과 함께 행복한 교제의 길을 걸었고, 하나님의 얼굴 광채를 가득하게 받았으며,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평화가 그의 영혼을 덮었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의 기쁨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에 대한 취미를 잃었으며, 기도를 짐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가 지은 죄는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사 59:2) 그는 이제 하나님의 손길 밖에 있으므로 마음에 휴식이 없다. 그는 세상에 빠졌지만 불신자들이 누리는 기쁨으로 마음에 휴식이 없다. 그의 곤경은 참으로 가련하기만 하다.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잠 14:14)...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더이상 하나님의 길을 기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되고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속에 하나님 경와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렘 2:19)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최상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가 이렇게 비참할지라도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렘 3:14)고 부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부르심에 대해 답변하기란 구경꾼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보다 쉽다.

하나님께서 회복의 과정을 어렵게 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다. 타락한 사람은 자기의 상태가 어떠한지 또는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에는 눈멀게 하고 강퍅하게 하는 효력이 있어서 사람이 죄의 권세 아래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는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시 보려고 하는 사람조차도 회복에 대한 진정한 욕망을 갖지 못하는데, 이는 죄가 마비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이 상태가 더 좋다'는 마음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다윗조차도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 처음에는 자기가 처한 곤경을 깨닫지 못했다. 사단의 마력이 깨어진 것은 선지자가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지적했을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므로 잠에서 깨어나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는 말씀을 듣게 된 사람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수락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과오를 입술로 시인하고 외적인 의무들을 다시 수행하는 것이 영적 회복의 전부라면 영적 회복은 간단한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적 회복의 조건들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존 오웬(John Owen)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영적 회복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편하게 그리고 체면차리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지게 하려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일을 해야 한다. 존 브라인(John Brine)은 '복음적 표준'에서 200년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기록했다.

"이 일에는 많은 노력과 열심이 필요하다. 우리 영혼의 병든 모습을 한탄한다고 해서 이 병이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 병이 찾아왔다고 자주 고백한다고 해서 이 병이 물러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전의 건강과 기력을 회복하고 싶어한다면 한탄하고 신음하기보다는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움직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