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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44]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44]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29. 11:10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서론8)

여기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들을 살펴 보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나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because)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 22:15-18).

이보다 더 명백한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삭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이는(because)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4,5).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좇았기 때문에, 영어 성경에는 because가 있음:역주) 그의 갔던 곳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운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왜냐하면) (영어성경에는 because가 있음:역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2,13).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because)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수 14:14)

다윗은 말한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삼하 22:21).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 이 구절을 읽고 혼란을 느낀다면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의 근본 의미를 이해한다면, 거기에는 이해 못 할 아무런 난점도 없기 때문이다. 문맥을 의식하고 읽으면 명쾌하게 이해된다.

다윗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골리앗과 사울, 그리고 다른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셨음을 넌저시 암시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다윗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가 그의 적들처럼 심각한 범죄를 행했는가? 그가 그의 원수들 중 누구에게 잘못을 범했는가? 그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을 찾는 것은 공정한 것인가 불공정한 것인가?

다윗의 생애를 읽어보라. 다윗이 사울의 보좌를 탐내거나 사울을 미워했다거나 하는 암시조차도 찾지 못할 것이다. 사실상, 그는 자기를 해치려는 그들에 대해 악한 계교를 전혀 품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 속에서 증명된다.

"무리하게(wrongfully)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35:19).

다윗이 지금 선한 양심의 증거를 즐길 수 있는 것은 그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보복하지도 않았으며 또 주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하게 중상 모략을 당하고 섬뜩한 일을 많이 만났으나 그는 정직하게 행동했고 평상 수준 이상으로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사울이 그를 몹시 핍박할 때도 그는 사울과 그의 부하를 해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시기와 배반과 배은망덕으로 보상을 받으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섬기려고 하였다"(Thos. Scott).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고 반대해도 우리 마음이 무죄와 무결을 확신하면 오히려 측량할 수 없는 위로를 맛본다.

그러므로 그런 시련의 계절을 지날 때 "하나님과 사랑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씀으로써"(행 24:16)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편, 다윗은 지금 바리새적인 정신을 자랑하라고 배출구를 열어 주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인간의 척도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공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무죄임을 아는 것은 교만죄가 아니다. 그리고 현세에서 자신의 무결에 대해 하나님이 보상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도 교만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 각각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라고 말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의 세상 통치 원리들 중의 하나를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와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분여되지만, 섭리의 영역에는 적어도 악인이 해를 당하고 의인이 구원을 받는 식의 공의의 원칙이 분명히 있다"(C.H. 스펄젼)

이 말들은 스펄젼이 다윗의 견해, 즉 현세에서의 하나님의 통치 방식에 대해 지적으로 파악했음을 보여준다. 시인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지상에서 그의 원수들을 대하여 그의 행위의 결백함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 하늘의 법정에서 그의 의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22:20-28에 진술된 사상을 섭리의 영역으로부터 영적이고 영원한 왕국의 영역으로 전이시키는 일은 비난받을 일이다. 왜냐하면 그 사상은 하나님의 은혜 분배에 있어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도 해당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깨끗한 양심을 소유한 경건한 신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되고, 자신을 실재보다 형편없는 자로 간주하며 살아야 한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