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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4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4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최상

En Hakkore 2024. 4. 28. 13:42

하나님의 최상의 복을 즐김(서론4)

하나님의 최상의 즐김에는 분명한 조건이 있다. 그 조건은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 진술되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 14:8). '기뻐하시면'(delight)이란 말은 구원의 원천인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련이 있기보다는 신자들의 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의 만족도와 관련이 있다.

압살롬의 모반한 자를 피해 달아날 때 다윗이 한 말 속에서도 동일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리라"(삼하 15:25,26).

다윗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로부터 영원히 추방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그런 식의 복종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뻐하심' 사이를 구별하듯이 우리는 우리를 향한 그의 영원한 사랑과 현재의 기뻐하심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과 우리의 현재 행위를 용납하시는 것과의 사이도 구별해야만 한다. 통치하시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소를 지으실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오히려 후자이다.

만일 어떤 이가 그런 구분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라고 하신 말씀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8)라고 하신 말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가고 묻고 싶다.

전자는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랑하신다는 것이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시인하신다는 것이 아닌가? 또 우리는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렘 31:3)는 말씀이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 온 줄 믿는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는 말씀을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에녹에 대해서는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나(히 11:5), 광야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내가 이 세대를 노하노라"고 말씀하신다.(히 3:10).

위에서 언급한 바로부터 의(義)의 길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빛이 있다거나 혹은 공로 훈장을 받을 거라고 추론해서는 안된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어떤 일을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따라 완전하게 순종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다.

한편,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유익을 얻는다는 것과 획득자가 된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성경은 상급문제를 적지 않게 다루고 있다. 미래의 기쁨은 현세에서의 우리의 행위와 필연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마치 뿌리는 것과 추수하는 것의 관계와 같다(갈 6:7,8)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만일 각자 일한 대로 받는 성도의 미래 상급(계 22:12)이 하나님의 은혜나 그리스도의 공로와 상충되지 않는다면 성도의 현세의 상급도 상충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보복의 하나님"(The Lord God of recompenses, 렘 51:56)이라 부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며, 또 많은 성경구절들도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도 의(義)를 보상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