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실천 131]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권위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31]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권위

En Hakkore 2024. 4. 28. 13:36

제 10 장 복음적인 순종(7)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 8:12).

이 구절을 매튜 헨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실한 노력을 수반할 때 할 마음(the willing mind)은 인정된다. 우리가 선(善)을 목적하고 우리의 능력을 따라 노력할 때 우리의 목적과 능력 그 자체를 인정하신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해서 거절하지 않으신다. 이는 선한 사업 외의 일에서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는 신중하게 덧붙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자. 이 성경 구절이 선한 의도만으로 충분하다거나, 선한 목적과 자원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성질의 행위는 실제로 행해야 인정받는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을 중시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마음의 명령을 따르는 자원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 의도의 순수성에 따라 우리를 평가하신다. 사랑으로 행할 때 작은 것이 큰 것으로 간주된다. 혹 그것이 "어린 반구 둘"(눅 2:24)이든, 또는 수천 마리의 황소와 양이든(왕상 8:63)간에 진정한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된다.

"은혜언약은 우리 순종의 양(量)이나 등급을 요구하지 않고 순종의 질(質)과 본질, 즉 신실함과 정직함을 요구한다"(Ezek. Hopkins). 율법적 순종과 대조적으로 복음적 순종은 정직한 목표와 순수한 노력과 그리고 말씀의 교훈을 따라 하나님과 가까이 행하고 또 거룩하게 살려는 몸부림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복음적 순종은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으며 보상받는다.

비록 그것들이 실제로 성취되지 못해도 거룩한 목적과 신실한 결심은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에 관한 기록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렸다"(약 2:21). 아브라함은 결코 실제로 이삭을 '제단에 드리지' 않았다. 그가 드린 것은 단지 지원하는 마음과 의도였다.

맨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일을 이미 행한 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나 오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식의 게으른 태도는 제외된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몸에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는 말씀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다윗은 이스라엘 중앙에 여호와 하나님은 위한 보다 적절한 처소를 마련하려는 계획과 열망으로 가득했었다. 훗날 솔로몬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 있는 것이 좋도다"(대하 6:8).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받으셨고, 그의 종 다윗이 전을 지은 것으로 간주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순종이다.♡ 비록 불완전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을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완전한 것으로 받으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인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충족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완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정직하라 내지는 신실하라"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절대적 완전이란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율법적 순종은 공의로 판단되고, 복음적 순종은 자비로 용납된다. 전자는 율법의 조금도 감소되지 않은 엄격함에 따라 판단받으므로 단 하나의 결함이나 빠뜨림 없이 완벽하게 순종해야 하지만, 후자는 복음의 관대함을 따라 그리스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인정받는다.(갈 3:8)

역대하 30장에는,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보다는 행위의 동기를 더 중시하신다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례가 나온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잇사갈과 스불론의 많은 무리는 자기를 깨끗케 하지 아니하고 유월절 양을 먹어 거룩한 규례를 어긴지라 히스기야가 위하여 기도하여 가로되 선하신 여호와여 사하옵소서 결심하고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아무 사람이든지 비록 성소의 결례대로 스스로 깨끗케 못하였을지라도 사하옵소서 하였더니"(30:18, 19).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자비가 자기들의 그릇된 행위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다! "여호와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을 고치셨더라(30:20). 아,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자. 히스기야는 '그들의 마음을 준비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이 히스기야의 기도는  신명기 29:19,20의 내용과 상반되는 것이었다.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