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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3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권위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30]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권위

En Hakkore 2024. 4. 28. 13:36

제 10 장 복음적인 순종(6)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 다윗이 "내 계명과 내 법도를 지켰다"(왕상 11:34)고 했을 때, 상대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절대적인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그 길을 기뻐하시나"(시 37:23) 의인도 자주 넘어지고 타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불순종의 아들"(엡 2:2)과 "순종하는 자식"(벧전 1:14).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을 후자에 포함시키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그가 주저하는 것은 그의 양심이 덜 계몽되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께서 성부께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요 17:6)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의 순종이 완전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복음적 순종은 신실하고 효성스러운 순종이다. 그들이 죄를 슬퍼하여 용서를 구하고 완전함을 얻으려고 분투할 때 그리스도는 그들의 일생 동안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다. 그리고 용서받았을 때 모든 계명들을 순종한 것으로 간주하신다"(맨튼)

그분 앞에서 우리의 가슴을 칠 때,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모든 연약함을 용납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라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가 자기에게 거침돌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다윗은 많은 실수를 범하였고 엄청난 좌악을 저질렀으나 하나님께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시 119:55).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하였을까? 그것은 신령하고 거룩한 결의라는 내적인 관점과, 실패했을 때마다 깊이 회개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죄함을 얻어내곤 했던 그의 삶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외적인 관점에서였다.

맡겨진 달란트를 잘 사용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에게 전혀 실패나 실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이 히브리인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라고 기도했을 때, 히브리인  성도들 속에는 죄가 내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사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시기를..." 이란 말을 첨가한 사실에서 분명한 알 수 있다(히 13:21). 만일 하나님께서 완벽한 순종만을 용납하신다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요일 3:22)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이 말은 달리도 적용될 수 있으나, 특별히 현재의 우리의 논의에 아주 적절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실제에 대해 결코 무관심한 분이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첫번째로 살피시는 것은 행동의 정신이다.

의무는 외적인 형태로는 구분될 수 없고 내적인 틀로만 구분될 수 있다. 즉 한 가지 동일한 의무를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행하고, 또 다른 사람은 사랑의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행한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물도 어떤 것은 달고, 어떤 것은 짜다. 같은 색깔을 가진 사과도 어떤 것은 시큼하고 어떤 것은 달콤하다. 우리는 행동의 원리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외식의 죄를 범할지도 모른다"(S. 샤르낙). 안식일을 매우 철저히 준수했지만 바리새인들의 겉으로만의 준수는 하나님께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이 말씀은 우리를 전율하게도 하지만, 한편 큰 위로가 되기도 하며 감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만일 전능자께서 외식자들의 교묘한 경건의 모습과 말씨에 속지 않으신다면, 또한 그는 비록 그들의 행동이 거스리는 원리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하더라도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느 1:11) 사람들을 아신다.

우리 마음의 모든 의도와 동기는 전능자의 목전에서 벌거벗겨지고 공개되어진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의를 평가하실 때 그것들을 충분히 고려하신다. 이 사실은 그의 주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는 실수투성이의 베드로에게 위로와 확신을 제공하였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실제 나타난 현상들과는 달리 진실로 그리고 참으로]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당신의 의로운 요구에 못 미침]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하나님의 백성도 못 선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 130:4).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두려워하라. 얼마나 조화가 잘 된 진리인가!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