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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12]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

En Hakkore 2024. 4. 26. 11:34

제 7 장 금욕의 교리(개요 4)

육체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악한 것이다. 로마서 7:18은 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육체는 갈등이거나 교정할 길이 없다. 육체는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처럼 종교적인 두루마기를 입을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는 여전히 썩어 냄새를 피우는 것뿐이다.

불에 얼음이 던져진 것처럼 속에 거하는 죄는 거룩한 성향과 동기들을 꺼버린다. '육체'는 항상 선한 것에 대항하여 '영혼'을 악에 넘겨 버린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불신자들이 사는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부패한 본성에 따라 지배받고, 행동하고 원동력을 받는다.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은 한 가지 행동, 혹은 일정한 원리에 의해 전인(全人)이 지배당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그렇다. 그들의 욕망, 생각, 말과 행동모두가 이 악한 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 행동 방향 모두는 이 육체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행동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근본 동기이며 근본 목표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은 소용없으며 육체가 전부일 뿐이다.

육체는 역동적이며 능동적이고 야망적인 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정욕적인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항상 격렬하고 절박하기때문에 "육체의 정욕", 혹은 "육체의 욕심"(엡 2:3)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속에 거하는) 죄가 기회를 타서(악화되어서) 계명으로 말미암아(혹은 정욕을 이루었나니)"(롬 7:8). 교육이나 문화로써 속 사람을 어느 정도는 세련되게 만들 수도 있으며, 가정 교육, 혹은 기타의 영향력 등을 통하여 어떤 종교를 신봉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타적인 생각에서 큰 내핍생활을 자발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불교 신자가 열반을, 회교도가 낙원을, 카톨릭 교도가 천국을 얻으려는 노력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며,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육체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악한 원리(변치 않는)로서의 육체는 아직도 그들 안에 머물러 있어서 "성령의 소욕"(갈 5:17) 혹은 새로운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육체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롬 6:12)가 바로 그 말씀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데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 하나는 훨씬 더 크고 분명한 것이며 또 하나는 훨씬 분간이 어려운 것이다. 첫째는 공개적이며 육체적인 정욕이나 행위들로서 탐식, 술취함, 부도덕 등이다. '육체의 추잡성'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는 내적인 마음의 정욕들인데 이는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영혼 안에 잔뜩 움크리고 숨어 있는 것들로서 자만심, 불신앙, 시기, 탐욕 등이다. '영혼의 추잡성'이 그것이다(고후 7:1). 갈라디아서 5:18,19에서 사도는 이 두 가지의 추잡한 육체의 정욕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는 기만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대개의 경우 '육체를 따라' 산다고 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첫째 경우만 생각하고 두번째 경우는 무시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폭주를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동물적인 성욕을 나타내지 않으면 다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행위로는 나타내지 않았지만 그러나 육체를 따라 사는 것은 여전한 것이다. 그렇다, 너무 세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탐욕, 악독, 미움, 무자비, 자고함 등의 여러 가지 못된 정욕들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