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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08]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En Hakkore 2024. 4. 25. 20:36

제 7 장 금욕의 교리(서언 4)

지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가장 높이 들어서 사용하시던 사람들은 이 청교도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만 하겠다.

C.H.스펄젼,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래이 맥케인, 그리고 영국 국교에서 분리되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마다 교리 전파에 최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좀 자세히 관찰하면 곧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제각기 다른 설교를 듣는다 할지라도 그 설교를 계속 듣는 이들에게서는 독특한 하나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들에게서는 견고함과 차분함, 안정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런데 알미니안들 가운데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진리를 선봉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실수를 저지른 사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꿋꿋함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곳에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은 결핍할 것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이 주장되어지지 않는 곳에서 자만과 자족이 충만할 것이다. 자연인의 무기력이 강화되지 않는 곳에 성령님을 의지함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가 계속 지켜지지 않는 사람의 마음과 삶에는, 그 효력이 경험되어질 수 없을 것이다.

"교리는 인간을 낮추고 겸손하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옳다. 교리는 복음의 계획을 설명하는 것이며, 복음의 계획은 교리의 중심에 있다. 인간은 낯춰지며, 하나님은 원인(cause)으로 높임을 받으신다.♡

교리는 인간을 그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며, 하나님의 손에 대항하는 인간의 영광을 없애버린다. 교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발등상에 붙은 먼지라고 격하시킨다. 복음의 계획에 어긋나거나 인간의 긍지를 격려하는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고전 1:29). 사도 바울은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3:27)는 구절로써 '행위에 의한 칭의' 교리를 호통을 치며 끌어내리고 있다. 그러나 행위에 의한 칭의를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자랑은 배제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진리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우리 주님은 오래 전에 말씀하셨다.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 교리도 마찬가지이다.(캐녹 1660).

나는 이제, 약 17년 전에 일반적인 교리에서 특별한 교리로 진전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할 날이 언젠가 있으리라고 한 약속을 여기서 지키게 되었다. 독자 여러분 중에서는 '지금 주제가 금욕의 교리인데, 제목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항의하고 싶어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욕의 교리라면 일반적인 교리보다 뭔가 실제적인 면이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오늘날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넓은 것이다. 우리는 "경건에 관한 교훈"(딤전 6:3)이라는 말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이 경건에 관한 교훈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며,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영적인 원리들을 제공하는 단순한 지적인 제안 이상의 것이다.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교리의 본질적인 한계를 볼 수 있는데, 즉 교리는 그 의도와 목표가 경험한 삶, 부드러운 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교리는 순전한 것이며 또한 순전케 하는 것이다.

믿음에 관한 교리라고 할 때 그것은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 추상적인 사실, 혹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위대하고도 고상한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매일매일의 삶에 강력한 효력을 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단순한 사색적인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성경에 계시된 교리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생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이 그것들을 제시하신 것은 우리의 감정을 깨끗케 하시며, 우리의 특성을 변화시키기 위함이다. 은혜의 교리는 우리가 불경건과 세속적인 정욕을 버리고, 깨어서, 의롭고 경건하게 이 세상을 살 것(딛 2:11,12)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리의 더욱 큰 부분들(요 7:16)은 신비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정욕을 시정하고 그들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성경의 모든 것이 거룩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의 행위가 옳기만 하다면 그가 무엇을 믿든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말도 안되는 생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가 믿고 있는 것이 건전하기만 하다면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왜냐하면 그는 자연적인 애정보다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말로 부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부정할 수 있다.

우리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과 마찬가지로 복음은 자녀들로 그 부모를 공경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1:9,10에 나열된 못된 자들의 명단을 한 번 보라.

그들의 행위는 "건전한 교리에 반대되는 것"들이며 하나님의 표준이 요구하는 행위, 즉 영적인 취향과 유익한 본성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탐욕의 마음과 돈을 사랑함이 어떻게 신자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지 잘 살펴보라(딤전 6:10).

이는 일종의 이단이며 하나님을 좇는 교훈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 무서운 본보기를 우리는 유다에게서 볼 수 있다. 이제 다음에 말할 금욕교리는 분명히 성경의 실천적 교리 중의 하나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