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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107]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107]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보

En Hakkore 2024. 4. 25. 20:36

제 7 장 금욕의 교리(서언 3)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4). 강론이 악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강단에서 그 강론을 그쳐서는 안된다. 이성적으로 잘 생각하면 올바른 원리들로부터 정확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는 것이며, 명쾌하고도 확실한 주장들을 추론해낼 수도 있다.

어떤 명제의 진리를 효과적으로 추론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지지발언을 하고, 그것에 반대되는 진술에 대해 대답한다.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볼 때 명백하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고 초보적인 주제인 하나님 존재에 대한 문제를 설명할 때 바울은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인상깊게 강론하였다. "이와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9),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그는 인간의 타락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먼저 모든 이방세계의 특성과 행위를 길게 증명한 후, 구약을 인용하여 진술짓기를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우리의 마음은 이해력과 양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을 강론"하여 그 로마의 관리를 '두려워하게' 만들었다(행 24:25).

그러나 슬프다, 이처럼 성경을 강론하고 설명하여 교리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소위 경험만 외쳤으며 교리의 지식은 무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결과가 얼마나 개탄할 일인가 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우리 세대는 심지어 진리에 대한 신학적인 지식조차 결핍하고 있다.

소위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설교들이 신학적인 강론을 대신하게 되었고 복음의 커다란 근본은 모욕을 받고 있다. 한번 개신교 국가가 되었던 지역에도 가톨릭이 다시 들어가곤 했었다. 바로 그때, 경험으로는 그들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이다. 건전한 교리만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인 거룩함은 그 행위의 원천이 되는 뿌리가 마르고 시들 때 쇠미하게 될 것이 당연하다.

"믿음의 교리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순종은 기대할 수 없다. 반면에 행위 없는 교리 또는 단순히 신학적이고 시색적인 지식들은 실천되어지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다. 교리와 실천은 병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행하기 위해서는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처음 불을 밝힌 자는 또 다른 불에 이를 것이다"(J. 길).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 3:16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먼저) 교훈과 (그후에)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는 말씀이 순서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훈하고 있다. "네가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마찬가지로 디모데에게도 분부하고 있다. "이 말(3-7절의 교훈)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딛 3:8)

슬프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가르치되 그 줄기와 가지, 그 대의(大意)와 효력, 그 위치와 관계를 모두 다 가르치는 이는 너무도 너무도 적다. 영적인 진리를 바르고 명쾌하게 이해하는 것보다 더 멋지게 영적인 마음을 꾸미는 교양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실수를 멀리하게 되는 것이 거기서 시작된다. 영적인 결실도 거기서 시작된다. 교리는 하나의 틀(모형)이다.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던져 우리 마음의 모양을 얻는 것이다(롬 6:17). 뿌려진 씨가 어떤 씨냐에 따라 그 문하생의 삶이 결정된다.

16,17세기의 기독교를 상징했던 그 순결성, 그 독실함, 그 열심, 인간 앞에서의 의로움,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개혁가들과 청교도들의 설교는 주로 교리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결과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훈과 계명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그들의 생명을 내어놓았고 수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의 행동이 선하기만 하면 그가 무엇을 믿고 있든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하나님께 옳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