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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29]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29]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8. 17:45

1.이전 것은 지나갔으니(2)

복음의 사역자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패배하는 삶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으며, 또 그의 안팎의 적들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가르침을 가르치거나 그런 인상조차 보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그 자신의 힘만으로 적들과 대항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그의 속사람을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근심시키거나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시키는 어떤 잘못도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성도는 그 은혜를 계속 추구해야만 하며(히 4:16) 또 사용해야만 한다(눅 8:18). 만일 겸손한 자세로 추구하며 또 정당하게 사용하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약 4:6).

사단은 정말 강하다. 그러나 사단보다 강한 이가 계신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주 안에서와 그(His)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질 것(엡 6:10)이 요구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요 15:5), 반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강해지면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 그리스도인들은 "이긴 자들"이다.(요일 2:13; 5:4; 계 2:7).

따라서 우리는 균형유지를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는 완전주의를 벗어나야 함과 동시에 지나친 영적 패배주의에 빠져서도 안된다. 진리는 성경 전반에 걸쳐서 제시되지, 성경의 음울한 면이나 밝은 면 어느 한쪽에만 편파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는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간다(벧전 2:9). 그런데 만일 비중생인이 그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그를 소생시키셔야만 되며, 모든 무지와 잘못을 그의 영혼으로부터 즉시 일소시켜야만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면, 그는 부당한 결론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곧 그의 실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주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는 무거운 짐진 영혼에게 안식을 약속하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 약속이 그가 이후로는 마음의 완벽한 평온을 즐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셨다고 해서(마 1:21) 그들이 그들의 죄의 용서를 매일 매일 간구해야 하는 일(눅 11:4)에서 해방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이 불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구원이 로마서 13:11과 베드로전서 1:5이 보여주는 대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경험되어지거나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최상의 포도주'는 마지막 잔치를 위해 저장되어 있다. 영화는 아직 미래에 놓여 있다.

우리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고린도후서 5:17을 그들의 '경험'을 묘사하는 데 사용할 때 그 구절을 잘못 사용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 구절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강해하지 못함으로 그것에 걸려 넘어져오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그들이 거듭날 때 그들의 내부에 은혜의 이적이 역사하여 옛 심성이 그것의 악한 성향과 함께 근절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우호적이라고 공정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난 2천 년 동안 하나님의 자녀들 중 엄청난 수가 그 구절과 판이한 경험을 해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그것일까? 하고 잠시 동안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도 이 질문을 받고 당황해 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본다.

사려깊은 사람들은, 고린도후서 5:17을 인용하는 사람 열 명 중 여덟 명은 그 구절의 첫 단추를 생략한다는 것과 그 첫 단어의 의의를 만족스럽게 설명하고 있는 주석도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을 발견해 내리라. "그런즉(therefore)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그런즉'이란 단어는 그 구절에 대해 정밀검사를 실시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단어이다. 그 단어는 현재의 결론이 앞의 어떤 전제로부터 나온 것임을 암시하며, 또한 그 구절이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해 준다.

16절로 돌아가 보면, 그 구절도 '그러므로'(wherefore, 헬라어 상으로는 '그런즉'과 같은 단어이다)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단어 '그러므로'도 이 구절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한편 그 구절이 일종의 교훈 내지는 교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사도는 이 구절에서 자신의 회고담을 묘사하거나 하나의 의무를 권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논증 내지는 사상의 논리적 귀결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그 구절은 우리에게 계속 잠겨진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 구절 초두에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의 출현은 마치 문에 열쇠를 꽂아 놓은 격이다. 만일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면 문에 힘을 가하게 되고, 따라서 자물쇠는 뒤틀려 부서지고, 문짝과 돌쩌귀도 부숴지게 되리라. 달리 말하면 그 단어들을 무시한 해석은 뒤틀린 해석이며 불만족스러운 해석이란 뜻이다.

그 구절의 실마리를 풀어주는 핵심 단어를 무시하고 그 의미를 밝혀보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이 참 많다. 사람들은 보통 초두의 '그런즉'이란 말은 무시하고 고린도후서 5:17은 중생의 이적에 대해 단순히 언급하는 것이며, 중생을 경험한 사람의 내부에 일어난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가 난제에 부딪쳤음을 즉시 느꼈을 것이며, 자신들이 그 구절의 조건을 삭감했고 또 그 구절의 언어들을 제한하였음에도 즉시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비중생시대에 그들을 특정지웠던 '이전 것'들의 얼마가 '지나간 것'도 사실이나 아직 많은 것들이 잔재하고 있으며, 또 '모든 것'이 그들 내부에서 아직 새것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고통스러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