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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26]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26]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8. 17:44

제 2장 하나님의 능력

4. 참 신앙의 발생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심오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은 주 예수를 믿는 것이 시이저나 나폴레옹을 믿는 것만큼이나 손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비극적인 것은 많은 설교자들이 이 거짓말을 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믿는 것(to eb liev on Him)은 시이저나 나폴레옹네 대해 자연적이고 역사적이며, 지적인 차원에서 믿는 것처럼 쉬운 일일지 모르나, 영적인 차원에서 믿기란 쉽지 않다. 내가 지난 날의 모든 영울들을 믿을 수도 있으나, 그런 신앙은 내 생활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또한 내가 죠오지 워싱톤의 역사성에 대해 부동의 확신을 가질 수 있으나, 그에 대한 나의 신념이 세상을 위한 나의 사랑을 약화시킬 수도 없으며, 나로 하여금 죄로 더럽혀진 의복을 미워하도록 작용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초자연적인 구원에 이르는 신앙만이 생활을 깨끗케 한다. 이러한 신앙이 쉽게 습득되는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하리라.(요 12:3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대로 영접케 한다(요 1:12).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사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왕으로서, 또 구주로서만이 아니라 "임금"(행 5:21)으로서 제시하신다.

여기서 그의 "멍에"(마 11:29)를 짊어지는 일이 우리 영혼이 "안식"을 누리는 일보다 앞선 것처럼(마 11:29). "임금"이란 말이 "구주"란 말보다 앞서는 것을 주의하라!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길 바라는 만큼 자기들을 통치하시길 기꺼이 바라는가?

그들은 용서만큼 성결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하는가? 그들은 지옥의 불길로부터 구속받기를 갈망하는 만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속받기를 바라는가? 또 그들은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만큼 거룩한 생활을 사모하는가? 그들에게 죄의 지배가 죄의 중량이 그렇듯이 두려운 일로 부각되는가?

또 그들에게 죄의 더러움이 죄에 대한 책임과 정죄만큼 근심스러운 일이 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면서 함께 묶으신 규정들을 나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전혀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9).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the operation of God, 골 2:12)에 의해 택함받은 사람들 안에서만 일어난다. 죄인을 불신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으로 이전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 얻는 방식에 관헤 그릇된 개념을 소유하는 것 그 이상이다.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미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도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단지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귀신들도 그 정도는 한다(약 2:19). 그러나 그것으로 귀신들이 구원받지는 못한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모든 신앙의 대상들을 마음으로부터 단념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 경쟁의 위치에 있는 모든 대상들을 마음으로부터 끊어버리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신앙이다(갈 5:6). 그리고 사랑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입증된다(요 14:23). 그러나 자연인은 그의 부패한 본성으로써 그의 계명을 싫어한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보다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면서 그리스도께 헌신한 신앙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강력한 은혜의 이적이 역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6. 사면의식(赦免意識)의 전달

한 영혼이 "전능자의 화살"에 맞아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욥 6:4), 또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의 빛이 어두운 마음 속을 비춰 형언할 수 없는 더러움과 부패를 드러낼 때, 또한 한 죄인이 자기는 지옥에 적합한 존재라는 것과 이제 막 지옥에 떨어지려는 찰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그의 수먾은 죄악이 그를 노려볼 때, 그리고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대단히 노엽게 했다고 느낄 때(만일 당신에게 이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그 비참한 절망감 속에서 건져내 줄 수 있는 것은 신적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 그 신적 능력만이 긍휼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괴로와하고 있는 죄인을 그를 위협하고 있는 시꺼먼 물 속에서부터 구조하는 것과, 애굽을 덮었던 어두움보다도 더욱 심한 어두움으로 덮여 있는 마음에 죄의식과 함께 위로의 빛을 비추는 것은 전능자의 행위이다.

하나님만이 그가 입히신 상처로부터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실 수 있으며, 인간의 마음 속에 일어난 격렬한 폭풍우를 향해 잔잔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평화의 조항들을 므두셀라만큼 살면서 헤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이 길르앗의 향유를 부어주실 때까지는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고 죄의식을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성령께 일격을 받고 괴로움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에 스스로를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가 공동묘지 안에 있는 썩은 시체들을 부활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는" 일은 다윗의 심판에 나타난 대로 마음을 정케 하시는 전능자의 주권적인 행위이다(시 51:10). 모든 의사들을 동원한다 해도 시체에게 생기를 불어넣지 못하듯 모든 신학박사들을 동원한다 해도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할 수 없다.

그리고 격앙된 양심을 잔잔케 하는 그리스도의 행위는 돌풍과 날뛰는 파도를 잔잔케 하는 것보다 더욱 능력있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런 경험에 낯설은 사람들은 이 말을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죄책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한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또 무한한 능력만이 죄에 대한 절망감으로부터 인간을 구속해 낼 수 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