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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24]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24]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8. 17:42

제 2장 하나님의 능력

1. 중생

하나님의 능력이 옛 창조보다는 새 창조에, 그리고 원시 인간창조 때보다는 영혼을 새롭게 하고 영혼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도록 할 때 훨씬 더 많이 발휘되었다는 것을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조차 거의 깨닫지 못하고 있다.

죄와 의(義), 부패와 은혜, 그리고 타락과 성결 사이에는 무(無)와 유(有), 혹은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는 간격보다 훨씬 큰 간격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새롭게 하는 데에는 더 큰 능력이 요구된다. 큰 변화는 큰 이적을 필요로 한다.

병자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죽은 자를 살리는 변화에 훨씬 더 뛰어난 능력 발휘가 요구되듯이, 무로부터의 단순한 창조보다는 불신을 신앙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데 더욱 더 놀라운 능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배운다.

복음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 중에서 가장 기이하고 복스런 사역, 즉 땅의 비참한 벌레들을 불러모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골 1:12)하는 사역을 완성하실 때 전능자가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인간을 빚으실 때 그 흙 안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반대원리(principle contary)가 없었다.

그러나 죄인의 마음을 하나님 자신께 돌이키시려고 할 때는, 이 일에 대한 인간의 조력주의(principle of assistance)가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신적 은혜의 능력에 대항하기 위해 부패한 인간 본성의 전 세력들이 연합전선을 편다.

죄인에게 복음이 제시될 때 복음의 영광스런 내용에 대해 그의 지성이 철저히 무지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의지도 복음에 대해 오히려 빙퉁그러진다. 또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뿌리 깊은 적개심을 보여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외에는 아무 것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 속에 혐오감을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악한 마음의 사나운 경향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차라리 대양(大洋)의 진행방향을 바꾸는 것이 쉬우리라.

2. 죄의 확신

인간이 굉장히 자랑하는 '이성의 빛'과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양심의 빛'도 하나님과 관계된 일을 이해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무가치하다. 예수께서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33)라고 말씀하셨을 떄, 이 두려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그 어두움이 너무 '심하여서'(great) 사람들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것으로 단것을 삼으며 단것으로 쓴것을 삼는다"(사 5:20). 그리고 그 어두움이 너무 '심해서' 영적인 일들이 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고전 2:14).

그리고 그 어두움이 너무 '심해서' 인간은 자신의 실제 상태에 대해 철저히 무지하고(엡 4:18) 또 완전히 소경이다. 자연인은 이 어두움으로부터 자신을 구속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속에 대한 갈망조차도 전혀 없는데,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구속의 필요성을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실제로 거듭나게 하실 때까지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에 대한 영적 이해에 전적으로 무능력한 것은 바로 그들의 타락한 상태 때문이다. 복음을 듣는 사람 대다수가 그들은 이미 구원받았고, 또 참 그리스도인이며, 설교자의 어떤 논증이나 땅 위의 어떤 권세도 그들을 반대 입장으로 몰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말한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잠 30:12). 오리가 누워서 헤엄친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듯 그들의 자기 가신에 대한 표현도 잘못된 것이다. 그들에게 경고한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눅 13:3).

그러나 바위가 대양(大洋)의 물보라에 끄떡 않듯이 그들도 끄떡 않는다. 그렇다. 그들은 회개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또 회개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이 지옥의 위험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강력의 은혜의 이적이 그들 마음 속에 발생하지 않는 한, 그리고 신적 능력이 그들의 자만심을 산산조각내지 않는 한 그들에게는 전혀 소망이 없다.

한 영혼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죄를 확신케 되는 일(savingly convicted of sin)은 썩은 샘에서 단물이 솟아나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이다. 또 한 영혼이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 6:5)을 인식케 되는 일은 전능한 능력이 요구된다.

자연인은 독립함을 뼈저리게 느낀다면 은혜의 이적이 이미 역사한 것읻다! 또한 자연인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롬 7:18) 안다면 은혜의 이적이 이미 역사한 것이다! 자연인은 "자기를 사랑"(딤후 3:2)한다. 따라서 그가 "자기를 혐오하면"(욥 42:6 은혜의 이적이 또한 역사한 것이다!

자연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봉하고, 그의 사역을 후원할 만큼 자기가 그리스도께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그리스도릐 거룩한 존전 앞에 감히 설 수 없음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부르짖는다면, 은혜의 이적이 이미 역사한 것이다!

자연인은 자신의 능력과 성취, 그리고 확신을 자랑한다. 따라서 그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으려 함"(빌 3:8)이라고 진지하게 선언한다면 이미 은혜의 이적이 역사한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