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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실천 9] 그리스도인의 출발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9]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7. 10:49

제 1장 구원에 이르는 신앙(신앙의 본질 4)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저주받은 신앙의 반대이다. 불신은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께 반항하는 상태이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하나님과 화목된 마음에서 비롯되며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던 싸움을 그치게 한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구주이시며, 그를 의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영접하시려고 서서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머리로 동의하고 마음으로 승낙하는 태도 그 이상의 것이다.♡

그리스도께 영접되려면 나는 가난한 거지처럼(마 19:21) 나의 모든 의를 포기하고(롬 10:3)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할 뿐만 아니라 나의 고집과 하나님께 대한 반항(시 12:11,12; 잠 28:13) 또한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 세상에서도 왕에게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구하며 나아오는 반란 음모자나 선동자들은 왕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내던지고 왕에게 무릎으로 기어나오는 것이 관례이다.

마찬가지로 자비를 구하며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죄인에게도 이것이 요구된다. 다른 식으로 나아오면 이 신앙의 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그리스도께 순수한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이다(마 11:28; 요 6:37 등).♡

그러나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명확하고 필연적인 의미를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자. 만일 내가 '나는 한국에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한국에 오기 위해 어떤 다른 나라를 떠났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말 속에도 어떤 곳을 떠났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외에 확신하고 있던 모든 거짓된 대상들을 내어던지는 태도와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모든 우상들을 포기하는 행위도 또한 포함한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5).

그러면 여기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과거 시제에 주의하라.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다)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사야 53:6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아, 그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께 '오기' 전에 우리 고집을 따라 살던 길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잘 아는 돌아온 탕자도 그가 먼 외국에 머무르는 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이여, 만일 당신이 여전히 자기가 기뻐하는 길을 따라 살고 있다면 그리스도께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께 '나아옴'에 대한 간결한 정의들은 우리 자신이 억지로 꾸며낸 것들이 아니다. 죤 번연은 그의 책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Come and Welcome to Jesus Christ]에서 이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올 정직한 마음과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이다(여기서 번역은 누가복음 14:26, 27을 인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어디선가 참된 회심자(comer)를 묘사하였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그의 등 뒤로 던져버린 사람이 된다.

세상에는 거짓된 회심자(pretended comers)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의 전형이 마태복음 21:30에 나온다. 아버지의 분부에 답변하기를 "아버지여 그리스도께서 복음으로써 그들을 부르실 때 그들은 '가겠습니다. 주님' 이라고 응답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향락과 육체적인 쾌락 속에 빠져버린다.

C.H. 스펄젼도 요한복음 6:44에 관한 설교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일은 회개와 헌신, 그리고 주 예수에 대한 신앙을 동반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마음의 제 단계, 즉 믿음. 간절한 기도. 복음의 교훈에 대한 심령의 복종 등과 같은 필수적인 부가물들을 자체 속에 포함합니다."

또 스펄젼은 요한복음 6:37을 주제로 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죄로부터 돌아서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또한 모든 거짓된 확신을 떠나는 것이며, 죄를 사랑하는 마음과 단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확신과 소망의 고고한 기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나의 전 존재와 생명을 복종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기꺼이 영접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에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혹 어떤 사람은 그러면 왜 로마서 12:1과 같은 권면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며 반대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 반대에 대해 우리는 모든 권면은 그들이 시작한 그대로 계속 행하라고 그들에게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서 '영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 오늘날 은혜를 구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의 표준에 비춰 볼 때 얼마나 저급한가.

만일 당신이 성구사전을 찾아 본다면, 주와 구주 이 두 단어가 함께 들어 있는 모든 성경구절들 속에는 언제나 '주와 구주'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코 '구주와 주'. 즉 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6,47, 베드로후서 1:11, 2:30, 3:18등을 한 번 찾아보라.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만족과 고집대로 사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악한 삶에 대해 애통해 하며 참회할 때까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기꺼이 버리려고 할 때까지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자비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 시끄러운 촐싹거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그들의 말은 단지 모욕적인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최고로 무시무시한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며, 또한 끔찍스럽게도 사함이 없는 죄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은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마치 추악한 기형아와 같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없는 곳에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도 없다. 그리고 '진실된 사랑'은 순종에 의하여 증명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당신 친구로 인정하시지 않는다(요 15:14).

불신이 일종의 반항이라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이다. 이런 까닭에 로마서 16:26에는 '믿음의 순종'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건강이 육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얹제나 역동적이고, 그것 자체의 종류에 따라 열매를 맺는 강력한 작동원리이며 또한 충만한 생명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