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영적인 구원 69] 사중(四重)구원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69] 사중(四重)구원

En Hakkore 2024. 4. 14. 08:32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1

이것은 복음적 회개와 솔직한 믿음에 의해 확증된 중생에 뒤따라온다. 진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영혼은 그 때,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죄의 형벌, 즉 죄책과 죄의 삯, 그리고 처벌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사도들이 회개하는 간수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했을 때, 이것은 그의 모든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사면되었음을 의미한다. 주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라고 가나안 여인에게 말한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죄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왜냐하면 용서란 죄에 대한 책임과 처벌에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8)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주께서 실제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살전 1:10)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의 이 측면은 두 가지의 다른 관점,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 구원의 하나님의 측면은 그리스도의 중보적인 임무와 사역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은 그의 백성의 후견인과 보증인으로서 그들을 위하여 온전한 의로움을 행하시고, 그들이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을 그가 친히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켰다.

그가 재판을 받고,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은"(벧전 2:24) 바로 거기에서이다. 그가 그 백성의 죄에 대하여 속죄를 하시면서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시고 괴로움을 겪으신 것은 바로 거기에서이다. 그리스도가 내 대신 고난을 당하심으로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 그가 죽으심으로 나는 살았고,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심으로 나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은혜의 위대한 경이로움이며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로부터 끝없는 찬송을 받으실 일이다.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가 받는 구원에 대한 인간적인 측면은 회개와 믿음이다. 비록 이것들이 어떠한 공적(功績)이 되지 못하고 결코 우리의 용서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제시하신 순서에 따라 여전히 그것들은 수단으로서 필수불가결하다. 왜냐하면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만 비로소 우리가 구원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는 그가 이전에 그렇게 완고하게 집착하였던 그 더러운 대상들로부터 손을 떼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빈 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이며, 믿음은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는 것이며, 믿음은 그 죄인이 구원자를 영접하는 것이다. 회개는 죄의 더러움과 오염에 대한 혐오감이며, 믿음은 그것으로부터 깨끗케 됨을 구하는 것이다. 회개는 그 죄인의 입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는 것이라면, 믿음은 문둥이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와서, "주여, 당신이 원하신다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회개와 믿음은 찬송할 만한 은혜와는 달리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바 된 죄인이며, 자신이 거룩한 공의의 손에서 용서 없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비참한 죄인이라고 고백한다. 믿음은 부패하고 타락한 자아를 바라보지 않고 지옥에 가야 마땅한 피조물을 위하여 이미 예비하신 놀라운 약속을 응시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움켜 잡으려는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사랑을 붙잡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굴복하여 자신을 지배하는 그의 권한에 대하여 기쁘게 순종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언제나 진리라는 것을 승인한다. 영혼이 스스로 그리스도의 통치에 굴복하고 그분의 희생의 공적과 효험에 의지하자마자, 그의 죄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멀리 사라진다. 그는 이제 다가올 진노로부터 영원히 구원을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거스터스 토플레이디의 저 숭고한 시를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공포와 불신앙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 아버지시여, 당신은 나를 위해
흠 없는 아들을 고통 속에 두셨나이까?
인간의 의로운 심판관이
나를 대신하여
주님, 당신께 죄짐을 지어 주셨나이까?

당신이 나의 사면을 획득하시고
그 모든 거룩한 분노를
대가 없이 겪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값을 두 번 요구하실 리는 없겠지요?
처음에는 피 흘리는 보증인의 손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나의 손에서...
자기 백성이 진 빚에 대해
당신은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가장 비싼 값을 치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의로움에 피신하고
당신의 보혈이 내게 뿌리워졌으니
이젠 내게 진노가 임할 수 없습니다.

나의 영혼아!
위대한 대제사장의 공로에 안식하여라
그리고 평화와 자유를 만끽하여라
그 분의 효험있는 보혈을 의지하여라
예수가 너를 위해 죽으셨으니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까 두려워 말라

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의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 구원의 체험적인 측면과 관계가 있는 반면, 죄의 형벌로부터의 용서는 오직 법적인 측면, 다른 말로 하자면 믿는 자의 칭의와 관련이 된다. 칭의는 법정의 용어이며 법정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판사의 결정이나 판결이기 때문이다.

칭의는 유죄선고와는 정반대이다. 유죄 판결은 어떤 사람이 죄로 고발되어 그 죄가 확정되고, 따라서 법이 그에게 벌을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반면에 칭의는 피고가 무죄임을 발견하고, 법은 그에게서 흠을 잡지 못하며, 따라서 그는 무죄로 석방되어 인격에 어떠한 흠도 없이 법정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믿는 자들은, "모든 일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행 13:19)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그들이 하늘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 지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이 그들을 무죄로 석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나 죄의 선고가 없다는 것은 단지 그 일의 부정적인 측면일 뿐이다. 즉, 칭의는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에까지 그 의가 이르렀다고 선포하고 공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칭의는 율법이 완성되고, 준수되고, 높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정의로운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타락한 그의 백성은 그 거룩한 표준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성육신하여 그의 백성의 보증인이 되고 그들을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면하실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는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는가? 라고 불신자들이 제기하고 싶어하는 두 가지의 반박에 대해서 충분히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주 예수를 영접하라. 그러면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 우리의 죄악에 대한 책임은 그에게 법적으로 전가된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온전히 받으신 것이다.

그분의 순종의 공로는 우리들에게 전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보증인의 모든 충족성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롬 5:18,19; 고후 5:21 등). 이제 율법은 우리에게 대항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그 율법의 보상을 받을 권리를 가지게 된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