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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구원 64] 사중(四重)구원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구원 (Doctrine of Salvation)

[영적인 구원 64] 사중(四重)구원

En Hakkore 2024. 4. 14. 08:28

죄의 쾌락으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실제로 구원을 시작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서이다. 하나님은 죄의 형벌, 또는 처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기 전에 죄에 대한 즐거움과 사랑으로부터 구원을 해주신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직 자신에 대적하면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죄사함을 주신다면 그것은 성스러운 행위도, 정의로운 일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의 질서정연함이야말로 그의 사역의 완전성을 가장 잘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그의 백성들을 죄의 쾌락으로부터 구해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악을 미워하고 거룩함을 사랑하는 본성을 나누어 줌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이런 일은 그들이 거듭날 때 일어나며, 그래서 구원은 실제적으로 중생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것은 당연히 그렇다. 그밖에 어디에서 구원이 시작될 수 있겠는가? 타락한 사람은 그가 성령에 의해 새로와질 때까지는 구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며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올 수도 없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들의 '때'를 잘 관찰해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적 창조물의 아름다움의 대부분을 놓치게 된다. 성령께서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라고 우리에게 명백히 말씀하심으로써 친히 이 점을 강조해 주시지 않았는가?

29절은 하나님의 예정론을 일러 주고 30절은 그것이 구체화되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매우 많은 설교자들이 그들 앞에 이와같은 하나님의 분명한 방법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칭의에 앞서서 그 효과적인 부르심 (죽음에서 생명으로 - 우리의 중생)에 대해 말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칭의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우리가 의롭게 되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중생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대단히 명백한 일이다.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행 13:39; 롬5:1; 갈 3:8). 그리고 죄인은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소생되어야 한다.

오, 이 마지막 말은 우리가 그렇게도 '몹시 이상하다'고 말했던 것에 대하여 빛을 던지며 또한 설명을 해 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자유의지론에 매우 철저하게 물들어서 우리의 신조들의 특징이었던 건전한 복음주의에서 거의 완전히 멀어져가 버렸다.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자의 체계가 피조물의 주위를 맴도는 반면, 후자의 체계는 그 궤도의 중심에 창조주를 모시고 있다는 데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는 인간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 주고 있지만, 칼빈주의자는 그 영예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 드린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는 구원에 대한 논의를 칭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죄인이 죄사함을 받기 전에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위로는 더 이상 소급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별것 아니다'라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로 배울 칼빈주의자는 '선택'에서 시작하여 '중생'에 이르게 되며, 또한 중생은 피조물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로서 죄인을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한다고 설명한다.

죄에 대한 쾌락이나 사랑으로부터 구원받으라거나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기뻐하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화를 낸다. 그들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깨끗하면서도 여전히 죄악 속에서 기뻐하였다는 비난을 반박하면서 정반대로 가장 어릴적의 기억에서부터 그들은 어떠한 모습으로든지 간에 사악함을 싫어했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우리도 그들의 성실성을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그것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마음이다"(렘 17:9)는 엄숙한 사실의 또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줄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할 성질의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이고 그 문제를 단 한번에 결정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판결을 넘어서서는 어떠한 호소도 불가능하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죄악 속에도 기쁨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와 쾌락'에 대하여 명백히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그 기쁨들은 단지 "잠시"(히 11:25)에 불과하고 그 결과는 기쁨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즉시 경고한다. 그렇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최고의 은혜 속에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영원한 형벌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자들"(딤후 3:4)에 대하여 말한다. 성경 속에서 이 불협화음이 얼마나 자주 울리고 있는가를 관찰해 본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성경은 "허사를 좋아하는 자들"(시 4:2),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시 11:5),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한다"(시 52:3), "그는 저주하기를 좋아한다"(시 109:17), "거만한 자들은 거만함을 기뻐한다"(잠 1:22), "그들의 마음은 가증하 것을 기뻐한다"(사 66:3),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도다"(호 9:10),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는 자"(미 3:2),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13)고 말씀하면서 그런 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누구나 갑자기 실족하거나 죄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구원 p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