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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장 78] 영적인 수단 본문

성장시리즈/영적인 성장 (Spiritual Growth)

[영적인 성장 78] 영적인 수단

En Hakkore 2024. 4. 5. 10:37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러한 우리의 드림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총에 비해 매우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바치는 것을 기쁘게 받으시며 또 기쁘게 표현하셨다. 이 말은 "행악한 자의 희생은 여호와께 싫어함이 되느니라"(잠 15:8)는 말씀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영적예배'(reasonable service)보다 나은 역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이고 합당한 방식은 신빙성이 있는 대안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확실히 지적으로 섬김받기를 원하고 계시지만 맹목적으로 미신적으로 섬김받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말씀에 따라 합당한 예배'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 '섬김'(service :그러나 개혁성경에는 '예배'로 번역되 있음)은 '예배'(Worship)로 번역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충성과 성전 섬김에 해당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렇게 하여 '희생'의 개념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마음, 또한 육체의 예배를 요구하신다. 그러나 앞서 나온 '그러므로'란 전제하에 우리는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곧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렘 8:9)와 '불법의 사람'(살후 2:3)이라 불려진다. 이들은 하나님의 길의 우수성을 식별할 지혜가 없다. 만물을 자기를 위해 지으신 자는 마땅히 피조물들에게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 지존자는 순종받아야 하고, 모오한 진리는 믿어져야 하고, 멸망시키는 자는 두려움의 대상이어야 하고, 상을 주는 자는 사랑과 신뢰를 받아야 한다."(E. Reynokds, 1670)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자가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합당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을 우리 하나님으로 선택할 때에 언약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에게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사 44: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엄숙한 동의로써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며 그의 요구하심에 내어맡긴다. 그는 자기의 권리가 우리의 동의에 의해서 인정된다고 말씀하신다. "내 멍에를 메고..." 그는 그것을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가 다시 묻는다면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주인이 바뀐다고 생활 모습이 바뀌어져서야 되겠는가? 죄에서 하나님께로 건지심을 입은 자들은 변화된 모습을 실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말이라는 것은 너무 값싸다. 행위가 말보다 더 크게 힘을 발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속죄제물로 주셨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감사의 희생제물로 드린다는 자체가 번거로운 일이 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가치한 존재들에게 조차도 만족을 누리셨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사려 깊은 하나 됨으로 그와 실제적인 일치를 맛본다 함은 '합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중생시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고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걸어가야 함은 너무나 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의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하고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명령받고 지배받고 감동받게 하기 위하여 충분히 자극을 주고 믿음으로 마음에 깨닫게 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혹자는 위의 것들이 영적인 성장이나 진보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방면에서 대답할 수 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드림이요 그와의 언약관계에 들어감을 말한다. 그의 약속은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명령을 기억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죄와 세상 가운데로 돌이킨다면 언약의 관계는 끊어진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영적인 성장이나 진보를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다시금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산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내가 만일 자기를 기쁘게 하는 길로 치닫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장은 고사하고 최초에 하나님께 헌신했던 길에서 떠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벗어 던지는 결과에 이르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속죄하셨다'(계 5:9)는 사실을 매일 깨달으면서 산다는 것은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가장 유능한 수단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권리를 우리 위에 머무르게 하고 그의 자비와 우정을 받아들이고 그와의 친분관계를 누리게 된다.♡

우리는 그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 존재하며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그의 섬김과 찬양에 온전히 헌신하게 될 때, 우리의 기쁨이 그의 안에서 용솟음칠 때, 우리는 우리의 구속계획을 활성화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삶에 있어서, 성장이란 우리가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요 값으로 사신 바 되었으니"(고전 6:19,20)라는 말씀에 지배받는 삶을 살 때 진척될 수 있다. 그것이 실제로 마음 속에서 이해될 때 그 영혼은 거룩한 제사장이 될 것이며 그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매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게 될 것이다.

그때 강권이 아닌 사랑으로 말미암은 진정한 헌신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될 때에, 그가 우리에게 남겨 놓으신 모본을 더욱 더 잘 따를 것이며 그때 우리는 진정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Arthur W. Pink 영적인 성장 p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