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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66]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66]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En Hakkore 2024. 2. 14. 11:39

사흘 동안 이스라엘 회중은 약속의 땅으로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는 그 강가에 진을 치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무적의 장애물 앞에서 자기들의 무기력함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요단 강은 죽음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신의 모든 본성적인 능력에 죽음이 씌워 있다는 엄숙한 진실을 처절하게 깨닫고서야 비로소 실제로 영적인 진전을 이루거나 실질적으로 기업을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바로 이것이 믿는 자들의 조상이, 그분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기 전에, 배운 큰 교훈이었다.🌱

사라가 불임이었으므로 그는 바라던 아들을 하갈을 통해 얻으려 했으나, 가정 내에 분란만 일으켰다. 그리고 자기와 자기 아내의 본성적인 무능력을 참으로 깨닫고서야 비로소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게 된 것이다(롬 4:17-21).

사도 중의 으뜸인 바울의 경우도 그랬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행 19:22-24)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

그분의 백성들이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받도록" 섭리하셔서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받을 가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죽음이 그들 모두에게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나이다"(대하 20:12)라고 고백하게 된다.

아, 그러나 그 다음에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을 주목하라.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사형선고"를 받은 처지에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자기를 신뢰하는 자들이요, 실질적으로는 상당한 정도로 자기를 의존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영적인 삶에는 전혀 끼어들 자리가 없고,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의 의를 버려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속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기에 앞서서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을 버려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불변의 요구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신뢰를 버리며, 자기 자신의 능력 있음을 부정하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흔히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 안심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모든 시도가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자신의 처절한 무기력함을 아직 배운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진정 자기 바깥으로 진정 자기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 주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다.

넘실대는 요단 강가에 진을 치고 있던 그 사흘 동안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철저한 무능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전능자를 의지할 차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의와 지혜와 힘을 다 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뜻과 자기를 기쁘게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해야겠다.

"자기"의 전체를 다 제쳐두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곧 자기 희생의 원리가 그 자신을 지배하고 주도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소극적인 것으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다. 순종의 삶 혹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실제적으로 누리는 일을 위한 예비적인 조처이다.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그중 가장 큰 우상은 자기 자신이지만-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함이요(살전 1:9), 그에게 굴복하고 그에게 다스림을 받기 위함이다. 바로 이것이 여기서 제시되는 중요한 진리이다.🫰

이스라엘은 요단 강을 쳐다보는 데에서 돌이켜 "언약궤"에다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언약궤는 과연 무엇을 누구를, 말씀하는가?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한다고 대답한다. 예, 그렇다. 그러나 이 대답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명확한 내용을 감지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라고요?
그분의 위격인가, 그분의 사역인가, 아니면 그분의 직분의 성격인가? 그분의 직분에 대해서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 대해 말씀하는 것인가?

주의 깊은 분들은 이 본문에 대한 영적인 해석이-교리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위의 질문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것이다.

언약궤는 여기의 이적적인 사건에서 중심을 이루는 물건으로서, 3장과 4장에서 최소한 열여섯 차례, 또한 "그것"이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여 다섯 차례 언급하고, 모두 스물 한 차례 언급되는데, 이는 7*3으로서, 성경의 숫자적인 언어에서는 하나님이 완전히 나타나심을 의미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