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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64]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본문

강해시리즈/여호수아 강해 (Gleanings In Joshua)

[Gleanings in Joshua 64] 요단 강가에 서서(여호수아 3:1-6)

En Hakkore 2024. 2. 14. 11:38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수 3:1).

싯딤까지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했고(민 25:1), 그가 죽은 후, 여호수아는 거기서 두 정탐꾼을 보낸 바 있다(수 2:1). 그들이 돌아와 호의적인 보고를 했고, 이제 그 후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로써 여호수아는 그가 바로 앞에 놓인 험난한 과제로 인하여 움츠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반드시 이기고자 하는 열심을 가졌다는 증거를 보였다. 여호와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와 협력하게 하심으로써 그분의 근면함에 상을 주셨다.👍

"여기서 그토록 오랫동안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곳을 떠나 요단 강으로 가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건널 다리도 없고 배도 없으니 어찌하랴?"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들어갈 것임이니라"(1:11)라는 약속을 굳게 붙잡고서 믿음과 순종으로 전진했다. 그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알지 못했다.

그 당시 그들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의 책임은 할 수 있는 만큼 임무를 이행하는 길로 전진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길을 열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수 3:2).

언뜻 생각하면, 그렇게 큰 무리가 사흘 동안이나 아무런 명령도 받지 못하고 거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때의 여호와의 계획을 감지하게 되고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을 잘 살펴보고, 마음의 눈으로 이 광경을 그려보자. 이스라엘의 무리는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군대가 아니었고, 각종 짐들과 가축 떼들은 차지하고라도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함께 섞여 있는 거대한 회중이었고, 강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 혹은 오늘날 요단 강의 폭과 깊이가 어떠하든 간에, 여호수아의 시대에는 도저히 건너지 못할 장애물이었음이 분명하며, 더욱이 그때는 물이 넘치는 시기였다(3:15).

그런데 그들은 사흘 동안 강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들 스스로 건널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 일에서 여호와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철저하게 속수무책의 상태에 있음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더욱 더 철저하게 여호와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섭리를 베푸시는 주요한 목적이 바로 이것인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우리를 넣으시고, 인간의 방법과 힘으로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의 무능력과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는 경우 말이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교만하고 스스로를 의지하는 자들이요, 육체의 힘이 연약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난관을 만나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들을 해결하거나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주는 은혜로 우리를 낮추고자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난제들이 늘어나고 곤경이 더 심화되고, 한동안 우리가 홀로 남게 된다. 요단 강 앞에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 어려움을 제대로 가늠하고, 우리 스스로는 그것을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음을 발견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 우리 자신의 무능함으로 깨닫고서 홀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사 그 곤경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수 있는 그 분께로 돌아서게 된다.

우리가 그토록 무딘 학생들이므로,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그 교훈을 거듭거듭 받아야만 한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