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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론 11] 성화의 필요성1 본문

성화론 (Sanctification)

[성화론 11] 성화의 필요성1

En Hakkore 2024. 3. 24. 13:06

본 장에서 우리는 신학적이거나 혹은 추상적인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매우 실천적인 방식으로 성화의 필요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이 글을 통해서 우리의 가련한 심령에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리고 우리의 무감각한 양심을 살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주제가 다루는 가장 중요한 줄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우리를 움츠려들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육체와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악 중에서 출생하고 죄 가운데서 잉태된 자들로서(시 51:5) 우리의 심령은 본질적으로 거룩을 싫어한다. 거룩을 경험하는 것과 상반된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정죄는 이것이니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둠을 빛보다 더 사랑한 것이라"(요 3:19). 이것을 의역해 보면 사람들은 죄를 거룩보다 더 사랑했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어둠은 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어둠의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다. 빛은 거룩하신 분을 예표한다(요일 1:5). 그러나 본질상 인간은 빛에 대적하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들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고 기록되어 있음을 본다.

같은 효과를 담고 있는 말씀을 주 예수께서 선언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 하나님은 육적이요 타락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자신과 함께 가까이 있도록 부르시지는 않을 것이다."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 3:3).

거룩하지 않은 영혼과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동의사항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함 가운데 영광스러운 존재이다(출 15: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구별시켜 놓은 자들은 하나님 자신에게 적합한 존재여여만 한다.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히 12:10).♡

사람과 함께하는 주님의 모든 길은 이 원칙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의 말씀은 계속해서 선언하기를 그는 악한 자들을 기뻐하시거나 악이 그와 함께 거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신다(시 5:4).

아담 안에서 우리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잃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 본성의 순결함도 상실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하며 우리의 속 사람이 성결케 되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 매우 역겨운 존재가 되게 하여 그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떨어지게 한 우리의 본성 전체에는 영적 나병이 퍼져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질병을 제거하기 위하여 죄인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상관없이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질병을 숨기는 것이지 깨끗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담은 그의 벗은 몸을 숨길 수도 없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주요 부위를 가리고자 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외적 의식으로 그 수치를 숨길 수 없으며 인간의 본능적인 더러움을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영역에서 실수를 하지 말라. 기독교의 외형적인 고백이나 몇 가지 선행들이 우리를 삼중으로 거룩하신 분에게 나아가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성령에 의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악들이 깨끗이 씻음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들을 가지고, 외적인 나타남과 장식품들로 만족하고 산다. 그들은 본질을 위해서 그림자를 잘못 사용하고 목적 자체를 수단으로 삼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헌신적인 성도들처럼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곤고하고 비천하며 가난하고 보지 못하며 헐벗고 있는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계 3:17).

어떤 설교도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에스라 선지자처럼 외치는 소리조차도 그들에게 들리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6).

어찌하랴! 만일 그와 같은 죄인들은 형벌을 피치 못할 것들임을 알지 못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들의 양심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것들을 인하여 어떤 내적 수치스러움도 가지지 않은 자들이다.

특별히 그들의 본성의 전적 타락과 더럽혀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알고 느끼는 것에 대하여 어떤 것도 몹시 슬퍼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들의 눈에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정작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세대들이 있다(잠 30:12). 비록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결코 씻음을 받은 적이 없고 그들의 심령이 믿음으로 정결케 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행 15:9) 그들은 스스로를 순결한 자로 높이 평가한다.

자신들의 어리석은 부패함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세대는 그리스도 당대에 자신들의 의를 내세웠던 바리새인들과 같다. 그들은 지루하게 긴 예전적 의식 행위에서 그들의 손과 잔을 계속적으로 씻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속에 썩어 냄새나는 것들로 가득하고 있음에 대해 전혀 무지하였다(마 23:25-28).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자들 역시 그와 같다. 그들은 견해에 있어서 정통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의 품행은 존경받을 만하며 정기적으로 헌금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내적 상태에 대한 양심적인 소리를 전혀 듣지 않는다.

Arthur W. Pink 성화론 p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