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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109] 야곱의 인생 행로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109] 야곱의 인생 행로

En Hakkore 2024. 3. 20. 11:53

계속해서 신자(信者)의 모형으로서의 야곱을 살펴보도록 하자. 각각의 족장들이 신자 안에 있는 특별한 사실들을 어떻게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지 주목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신적 주권의 사실과 믿음의 삶의 사실을 본다.

또 이삭에게서 신적 아들됨(divine sonship)의 사실과 믿음의 삶의 사실을 보며, 야곱에게서는 신적 은혜의 사실과 투쟁의 삶의 사실을 본다. 또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선택의 사실을, 이삭에게서 새로운 탄생과 사실을 그리고 야곱에게서 두 본성이 나타나는 사실과 함께 그가 외삼촌의 집에서 종으로 섬긴 사실을 본다.

이와 같이 우리는 구약에 나타나는 각각의 족장들의 생애가 지금 신약에 충분하게 계시된 것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세 족장들의 순서를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순서는 항상 이와 같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주권적 선택의 대상인 아브라함이 먼저 와야만 한다. 그리고 다음에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아버지 집의 상속자인 이삭이 오며, 그 다음에 종인 야곱이 따른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순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 동안의 섬김의 삶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놓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들이 되는 것을 마지막에 놓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이 되는 것을 처음에 놓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합당하게 섬기고자 한다면 먼저 나의 아들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바울 사도 역시도 "내가 속한 바 그리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이러한 순서를 표현했다(행 27:23, 한글개역개정판에는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음).

우리는 야곱의 생애 가운데서도 이러한 순서가 나타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밧단아람에서의 섬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는 벧엘을 통과해야만 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앞서 먼저 그의 집의 권속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순서는 호세아에도 나타난다. "야곱이 아람의 들로 도망하였으며 이스라엘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섬기며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고"(12:12). 여기의 이야기를 우리는 창세기 29장과 30장에서 발견한다. 거기에서 우리는 야곱이 라반의 신실한 종이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창 31:38-40).

이와 같이 세 명의 위대한 족장들의 순서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순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택하심"과 "아들이 되는 것"과 "종으로 섬기는 것"의 순서를 그대로 보여 준다.  그랜트(F. W.Grant)가 특별히 이것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그는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 즉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는 말씀을 해설하는 가운데 이렇게 말한다(출 3:15).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아버지의 모형이, 이삭에게서 아들의 모형이, 그리고 야곱에게서 성령의 역사(役事)의 모형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나아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말했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는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하고 말했다(민 23:23). 요컨대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를 이루어 가시는 자이다."♡

이와 같이 세 명의 위대한 족장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각각 신적 계시에 있어서의 어떤 특정한 진리들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안에서 우리는 선택의 진리를 본다. 하나님은 땅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를 선택하셨다. 또 우리는 같은 진리가 이삭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마엘은 그냥 간과하시고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라고 선언하신 것으로부터 분명하게 나타난다(창 21:12). 나아가 이삭은 신적 아들됨(divine sonship)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개입으로 초자연적으로 태어났다.

또 우리는 야곱에게서 이러한 두 가지 진리가 좀 더 특별하게 나타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보다 더 분명하게, 야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대상이었다. 켈리(W. Kelly)는 "야곱(Jacob)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롬 9:11-12).

이것은 전에 여종과 그의 아들을 쫓아내는 것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셨었다. 그러나 그것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선택하신 것에서 훨씬 더 강조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자랑해야만 한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권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있는가? 아 죄인이여! 오직 허물만이 있을 뿐이 아닌가? 신자는 거듭난 순간부터 이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진리는 오늘날 사람들에 의해 많은 반박을 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진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그리피스 토머스(Griffith Thomas)의 '창세기 주석'(Commentary on Genesis)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신적 주권의 놀라운 영광을 본다. 어째서 형 대신 동생이 선택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동일한 원리가 다른 경우들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 데라의 장자가 아니었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요셉은 야곱의 장자가 아니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자연(nature)의 순서가 필연적으로 은혜(grace)의 순서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은 은혜를 나타내고자 하셨다. 💕

물론 신적 주권의 문제는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단순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단지 영적인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하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연 안에서 예컨대 사람의 기질이라든지 인종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발견된다.

고레스와 바로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인류 역사(歷史) 전체는 신적 선택의 실례(實例)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든 이해할 수 없든, 신적 선택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종종 불가사의하기는 하지만 확실하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 나타나는 것처럼, 신적 선택이 사람의 공로라든지 혹은 그의 어떠함과 무관한 것은 완전히 명백하다(롬 9:11).

그러한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바울의 말과 완전하게 일치된다(엡 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자신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엡 1:11).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일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왜 그렇게 일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에도 평온한 마음으로 '옳소이다 그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눅 10:21)."

이와 같이 야곱에게서 우리는(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적 주권이 나타나는 것과,(이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듭남의 진리가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한다. 리브가가 야곱을 잉태한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오로지 기도와 신적 개입의 결과였다. 창세시 25:21을 보라.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264

■ 창세기 25장 21절.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