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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73]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본문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3:18).
앞 문맥에 이어 여기의 말씀이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교훈을 주는가! "마므레"는 부요함을 의미하며, "헤브론"은 교제를 의미한다. 18절이 "이에"(then)로 시작하는 것을 주목하라. 롯이 떠나고 아브람이 여호와의 뜻 안에 충분하게 있게 된 후에, 헤브론(교제)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가로막는 것은 불신앙이다. 여기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교제는 예배로 승화된다. 순서는 항상 다음과 같다 - 순종, 영혼의 부요함, 교제, 예배, 여기의 "헤브론"이 훗날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던" 갈렙의 기업이 된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사실인가!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내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수 14:!4).
창세기 14장에서 우리는 전쟁이 최초로 언급되는 것을 발견한다. 네 왕과 다섯 왕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목적은 다만 아브람이 그 전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그 전쟁의 결과 롯이 사로잡히고 그의 재물이 노략을 당했다(12절). 그는 자기를 위해 보화를 땅에 쌓아 두었으나, 도적이 뚫고 들어와 모두 훔쳐갔다. 그 사실을 아브람은 도망한 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알게 되었다(13절)
아브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의 결과를 주목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아브람은 조카의 안위(安慰)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 안에 쓴 뿌리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싸늘한 마음으로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롯은 자신의 뿌린 것을 거두어야만 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는 즉시로 롯을 돕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단순히 롯이 육체의 친척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여기에서 그를 움직이게 만든 것은 단순한 친족의 정(情)이 아니었다. 14절을 주목해 보라.
"아브람이 그를 형제("조카"가 아니라)가 사로잡혔음을 듣고"(when Abram heard that his brother was taken captive,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조카"라고 되어 있음). 형제(영적인 형제)가 절박한 위험가운데 있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갔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무나 분명하지 않은가? 얼마나 자주 "형제"가 적에게 사로잡히는가? 그럴 때 마땅히 우리는 그러한 자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는가?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하지 않은가? 우리 주님을 보라. 그는 얼마나 다른가? 그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주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신다. 그는 그 양을 찾을 때까지 결코 쉬지 않으신다.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롯이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람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로 그들을 쫓아갔다. 그리고 그들을 기습하여 성공적으로 조카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구출했다.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15-17절)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다름 아닌 멜기세덱이다. 그에 관해 많은 연구가 행해지고 많은 책이 씌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100년 정도 아브람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멜기세덱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다"는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히 7:3). 뒤에서 보게 될 것처럼, 이것은 그의 족보와 관련하여 성경이 절대적으로 침묵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멜기세덱이 셈이라는 이론을 폐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 자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 역시 성경과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으며", 또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멜기세덱의 제사장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히 7:3, 15).
멜기세덱이 그리스도 자신이라면, 이러한 표현들은 결코 가능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신비한 천상의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이론을 명백히 부인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7:4에서 멜기세덱은 "사람"으로 분명하게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7:3의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멜기세덱과 관련한 비밀을 여는 열쇠를 발견한다. 멜기세덱은 그리스도의 모형, 특별히 우리 주님의 제사장직의 모형이다. 우리 주님과 비슷하게 멜기세덱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사실이다(히 7:3). 💕
이것은 그가 초자연적인 인물이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구약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없이 나타남을 의미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 그의 족보와 관련하여 아무런 언급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다.
멜기세덱의 조상과 관련한 완전한 침묵은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임을 제시하기 위해 성령께서 그렇게 이끈 것이다. 창세기는 수많은 족보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멜기세덱의 족보와 관련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의 한 실례(實例)이다. 여기의 침묵은 모형(멜기세덱)과 원형(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었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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