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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35] 에녹(창세기 5장) 본문

강해시리즈/창세기 강해 (Gleanings In Genesis)

[창세기 강해 35] 에녹(창세기 5장)

En Hakkore 2024. 3. 15. 10:13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예배 노선을 따라간 것을 살펴보았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하면서, 피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반면 가인은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면서, 대속의 희생제물이 아닌 자신의 수고의 소산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4장의 나머지 이야기는 불경건한 가인의 계열을 칠 대까지 추적한 연후에 하나님이 아벨을 대신하여 셋의 탄생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는 5장은 셋의 계열을 추적한다. 특별히 여기의 장(章)이 시작되는 도입어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아무개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라는 관용구는 창세기에 최소한 10회 나타난다(창 2:4; 6:9;10:1; 11:10; 25:12; 25:19; 36:1; 36:9; 37:2). 그러나 여기의 5:1에는 특별한 단어가 덧붙여져 있다 -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창세기와 구약 전체에서 이러한 표현 양식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신약을 펴자마자 나타나는 첫 번째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라"(마 1:1, 한글개역개정판에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되어 있음).

이것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의 한 가지 중요한 증거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와 같이 두 개의 서로 다른 표현 양식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유독 두 구절만 - 창 5:1과 마 5:1 - 일반적인 표현 양식과 다른 양식을 취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창세기와 마태복음은 각각 구약과 신약의 첫 번째 책이 아닌가? 구약의 첫 번째 책에 기록된 "아담의 계보의 책" 속에 첫 사람의 타락한 후손들의 이름들이 들어 있다. 또 신약의 첫 번째 책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 속에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하나는 사망의 책이며, 다른 하나는 어린 양의 생명의 책이다. 💕

한쪽에 "아담의 계보의 책"이 있으며, 다른 한쪽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놀라운 통일성을 보지 않는가? 성경 전체는 이 두 책 즉 아담의 계보의 책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책에 초점이 모아진다.

그러면 여기의 "계보"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 언급의 법칙"(law of First Mention) 즉 어떤 표현이 나타나는 최초의 용례(用例)가 그것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법칙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2:4에서 "이것이 하늘과 땅의 계보이니"(these are generation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한글개역개정판애는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라고 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창세기 2:4이 어떻게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면, 그러한 표현은 그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창세기 1장 첫머리에 나타났을 것이다. 또 창세기 6:9에서 "노아의 계보"라는 표현을 읽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그의 조상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 그것은 창세기 5장에 나타난다 - 그의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계보"는 기원이 아니라 역사(歷史)와 발전을 의미한다. 이 열쇠를 각각의 자물쇠에 넣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것이 정확하게 맞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의 계보(혹은 역사)." 이것은 여기의 창세기 5: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기로부터 우리는 아담의 자손들의 역사와 발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마태복음 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형제들"의 역사와 발전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5장으로부터 창세기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의로운 아벨은 죽임을 당했으며, 가인의 모든 자손들은 홍수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할 운명이 되었다. 셋으로부터 장차 노아가 탄생하며, 그의 아들들이 방주로부터 나와 다시금 땅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금 처음(beginning)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그리하여 셋의 탄생의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에서 아담이 다시금 언급된다.

우리는 창세기 5장 앞부분의 두 구절을 주의 깊게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1절). 그리고 또 한 구절은 3절이다.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죄로 말미암아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으며, 그의 본성은 부패되었다.

타락한 부모로부터 오직 타락한 자녀만이 나올 수 있을 뿐이다. 셋은 죄인인 아버지의 모양을 따라 태어났으며, 우리 모두의 조상인 노아는 셋의 직계 후손이었다. 우리 모두의 조상은 오직 자신이 받은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보편적 타락의 교리가 나타난다.

오늘날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 - 셋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새로운 단락의 첫머리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타락한 부모로부터 태어난 타락한 자손이라는 사실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조상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태어났다.

20절까지는 특별히 언급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셋의 후손의 계열을 보여 주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큰 글자로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죽었더라"가 8회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절에서 24절에서 우리는 매우 주목할 만한 예의를 발견한다.

이제 우리는 여기의 주목할 만한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Arthur W. Pink 창세기 강해 p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