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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 334] 대단원(사무엘하 24장)

En Hakkore 2024. 3. 10. 11:08

고집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삼하 24:4a).

요압은 다윗의 계획이 인간적 야심에서 나왔으며 그것은 백성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그는 다윗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그것이 실패하자 그는 군대의 사령관들을 동원해 왕에게 추가적인 탄원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허사였다.

다윗의 마음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고, 그는 고집을 부리면서 안타까운 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을 포괄적으로 보는 대신 계속해서 특정한 측면에서 편파적으로 바라 볼 때, 놀랍게도 그것은 자신의 판단을 왜곡하는 성향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대낮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일에 대해 눈이 멀어 버린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힘과 승리를 생각하는 데 몰두하느라 그의 마음에 강함이 아니라 약함에 대한 인식을 줄 수 있는 다른 상황들을 고려하지 않았다"(B. W. Newton).🥺

우리가 그분을 진노케 할 일을 계획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가! 그러나 종종 우리는 오만한 마음과 완고한 자기 뜻 때문에 그런 반대에 분개한다.

우리의 삶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는, 만약 우리가 잠시 멈춰서 그것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길 위에 설치해 놓은 울타리에 유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수많은 가시밭길을 피해갈 수 있다.

그 울타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친절한 충고의 형태를 띨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런 충고를 늘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고려하는 것은 늘 우리에게 유익하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고집을 부리면서 그 울타리를 뚫고 지나가고자 한다면, 그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심하게 찢길지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요압과 그의 사령관들의 조언에 반응했더라면 상황이 얼마나 좋아졌겠는가!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삼하 24:4b).

다른 경우에 요압은 왕의 악한 계획을 성사시키는데 기꺼이 헌신했다(삼하 11:16; 14:1-2 참조). 그러나 이때 그는 왕의 명령을 크게 꺼려하며 수행했다. 그가 다윗의 정책에 얼마나 반발했는지는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대상 21:6)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난다.

요압은 그가 막 시작한 일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일을 수행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삼하 21:1) 작정하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변명이 되지 못했다.

그가 그 일의 잘못을 분명하게 이해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수행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모든 사악한 일에 대한 죄책은 전적으로 그 일을 수행한 자에게 있다. 잘못된 일을 행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리고 요압은 어떤 식으로든 그런 악한 일에 개입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했다.

인구조사의 결과

요압은 그 마땅치 않은 일을 팔레스타인의 가장 먼 지역에서부터 시작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간을 지연시켰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왕이 그 일이 완료되기 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인구조사의 책임을 맡은 자들은 먼저 요단강 동쪽 지역 거주민들의 수를 헤아렸고, 이어서 가나안 북쪽으로 나아갔다가, 요단강 서쪽 지역에 이르러 그 일을 마쳤다(삼하 24:5-7).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남자들에 대한 완벽한 등록부를 만들었는데, 레위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제외했다. 전자는 그들이 맡은 성스러운 일이 그들을 군역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고, 후자는 아마도 그들이 다윗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삼하 2:28; 3:1 참조).

그 일에 거의 열 달이 소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서 얼마나 인내하시고 또 얼마나 자비를 베푸시는가! 아, 그러니 회개를 거부하는 우리의 광기와 죄는 얼마나 큰 것인가!🥺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 칠만명이라(삼하 24:8-9).

신중한 이라면 여기에서 제시된 숫자가 역대상 21장 5절에서 발견되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차이를 "성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오류들" 중 하나로 지목한다.

더구나 권위 있는 주석가들 중 일부가 성경의 기록의 "부정확성"을 암시하면서 그 "난제"를 풀고자 하는 것은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사실 그 두 가지 분류는 서로 아주 다른 것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완한다.

우리는 사무엘하 24장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9절)이라고 한정하는 반면, 역대상 21장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5절)라고 말하는 것에 신중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 백십만 명 중에는 "담대한 자"에 덧붙여진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역대상 21장은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고 말하는 반면 사무엘하 24장은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고 말한다. 차이가 나는 그 삼만 명은 분명히 칼을 빼는 자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서 살았던 5백여 년 동안에 그들이 애굽에서 체류했던 보다 짦은 기간에만큼도 수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럼에도 그토록 좁은 지역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그 지역 토지의 놀라운 비옥함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다.

그곳은 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13:5)이었다. 우리는 요압이 다윗에게 제시한 총수(總數)가 그의 기대에 상응했는지 아니면 그의 교만을 억눌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어쨌거나 그의 백성의 수는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많지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무언가를 얻으려고 작정했을 때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의 실제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실망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인 위에 있는 것에 애정을 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 그러니 우리는 그런 교훈을 얻는데 얼마나 느린가!🫰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3 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