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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fe of David197] 용서(사무엘하 12장) 본문

강해시리즈/다윗의 생애 (Life of David)

[The Life of David197] 용서(사무엘하 12장)

En Hakkore 2024. 2. 29. 11:53

우리의 영혼이 그런 상황-고민과 낙심이라는 "깊은 곳" - 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온전하게 내려놓는 것뿐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런 상태에서는 쉼을 얻지 못하며, 다른 그 어떤 피조물의 도움을 통해서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호 14:3).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도움을 찾을 수 있다. 기만적인 교황주의자들이 고안해 낸 헛된 것들 - 성모를 향한 기도, 고행, 고해성사, 금식, 미사, 순례, 보속 행위 등 -은 모두 "터진 웅덩이들"(렘 2:13)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죄로 고통당하는 영혼들에게 세상의 조언- '"환경을 바꿔라," "일에서 떠나라," "음악이나 사교나 쾌락을 즐겨라" 등 -은 쓸모없다. 평안의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고는 그 어디에도 평안은 없다.🫰

이제 시편 기자는 아주 낮아진 상태에서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그의 호소는 헛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 굳게 붙들 필요가 있는 가르침이다. 이 시편은 그런 목적을 위해 기록된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당신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개탄스러울지라도, 당신의 곤경이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당신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당신의 양심의 짐이 아무리 견디기 힘들지라도, 당신의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다윗은 부르짖었고 응답을 얻었다. 그는 자비를 구했고 그것을 얻었다. 그리고 당신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다윗이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선지자 요나를 생각해 보라. 그는 자기 뜻을 쫓아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다가 바다에 던져졌고 결국 큰 물고기에게 삼켜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내가 받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 2:2).

다윗을 움직여 여호와를 찾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에 대한 그의 소망이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 130:3-5).

3절에서 그는 자기가 자신의 의를 의지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만약 하나님이 "죄악을 지켜보신다면," 즉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정죄하신다면, 그때는 자신의 상황이 참으로 소망이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4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 그분에게  사유하심이 있음을 겸손하게 상기시켜 드린다.

또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분을 경외해야 한다고 일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한 허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절에서 그는 소망 가운데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은총의 표적"(시 86:17)과 "편안한 대답"(창 41:16)이다.

용서에 대한 탄원

그러나 시편 51편에서 우리는 아주 분명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전에 그는 여러 가지 "죄"의 동의어들을 사용해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감정을 "용서"의 동의어들을 반복해 사용하는 것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의 입술에서는 용서에 대한 탄원이 반복해서 터져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이 말을 많이 해야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에 대한 그의 진지한 갈망 때문이었다. 즉 그런 반복은 그의 불굴의 신앙에 대한 징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알 선지자들이 정오부터 시작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왕상 18:29) 계속했던 탄원은 그 탄원자들의 의심을 보여 줬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경고하셨던 "헛된 탄원"은 단순히 동일한 형태의 요구를 반복하는 것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교황주의자들이 라틴어로 된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거기에 무슨 미덕이나 공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에도 해당된다.

다윗은 자신의 죄가 "지워지기를"(1절) 기도했다. 이 탄원은 그가 그 죄를 자신에게 불리하게 기록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윗은 자신이 그 죄로부터 "말갛게 씻기기를"(2절) 기도했다. 이 탄원에서 그 죄는 더러운 얼룩으로, 따라서 그것을 없애려면 세게 문지르고 두들겨야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어떤 주석자들에 따르면, 실제로 이 구절의 성경 본문에는 그런 의미를 지닌 히브리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정결케 되기를"(7절) 기도했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제사장들이 나병환자를 깨끗케 한 후 그가 부정(不淨)을 털어냈음을 선포하는 데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였다.

이 마지막 인용구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적인 전용(專用)이 들어 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들뿐 아니라 시체와 접촉함으로써 부정해진 사람들 역시 그런 식으로 정화되어야 했기 때문이다(민 19). 그리고 그런 종류의 부정(시체와 접촉하는 일-역주)이라면 우리아를 죽인 자보다 더 심한 자가 누구겠는가?

그 기도의 원문은 더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죄"(sin)를 지칭하는 단어로부터 나왔고, 만약 우리의 언어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 구절은 "주님이 내 죄를 없애 주소서(un-sin)"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

그의 죄는 그의 약점과 정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자책과 고뇌는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갈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시편의 탄원들은 다윗 안에는, 그의 약함과 사탄이 그에게 거둔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룩한 요소의 뿌리가 남아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자신을 거듭나지 못한 자의 대열에 놓는다. 그는 자기가 스스로 회복 또는 갱신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임을 시인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기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그분이 우리의 행위의 질 뿐 아니라 영혼의 상태까지도 고려하신다는 것을 시인한다. "정직한 영"은 사랑이 깃들고, 신뢰할 만하고, 순종적이고, 견고한 영으로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나눠주거나 유지할 수 없는 영이다.

다윗이 자신을 한껏 낮춘 상태에서 드리는 고백과 용서에 대한 간절한 부르짖음의 한 가운데서 온전한 교제의 회복을 위한 담대한 요청이 강렬하고 아름답게 제기된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12a절).

이런 요청은 자신의 죄의 모든 결과들을 지워주실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에 대한 보통 이상의 확신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탄원의 위치에 주목하라. 그것은 용서와 정황에 대한 간구 뒤에 나온다. 그런 것들과 무관한 "구원의 즐거움"이란 허세에 광기에 불과하다.

"너그러운 영을 보내셔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12절, 표준새번역-역주). 먼저 그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11절)라고 기도했다. 분명히 이것은 그의 전임자였던 사울에게 떨어졌던 무서운 심판에 대한 언급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앞선 탄원이 받아들여졌다고 확신하면서, 또 자신의 약함과 자기가 스스로 설 수 없음을 의식하면서, 인간에게 성결함을 나눠 주시고 그것을 유지시켜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Arthur W. Pink 다윗의 생애2 p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