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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anings in Joshua 222] 속임수 중의 존귀(수 9:1-27)
En Hakkore 2024. 8. 13. 21:462. 기브온 주민들
앞에서 우리는 여리고와 아이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놀라운 승리에 즈음한 가나안 족속들의 이중적인 대응에 대해 살펴보았다.
곧 가나안의 왕들이 연합하여 무력을 사용하기로 했다는 것(수 9:1-2)과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속임수를 썼다는 것(수 9:3-6)이 그것인데, 이는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여 사용하는 방법의 두 가지 성격을(포효하는 사나운 사자와, 또한 속임수를 쓰는 간교한 뱀의) 실례로 보여준다.
이 중에 후자가 전자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성공적이라는 것을 영적 역사와 교회 역사 모두 입증하고 있다. 노골적인 박해로도 신실한 자들을 박멸하거나 회유하는데 실패하면, 사단이 은밀한 간계를 써서 그들의 증언을 부패시킨다. 그 이유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맹렬한 박해는 훨씬 더 쉽게 드러나며, 동시에 신자들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주시는 힘과 결연한 의지에 기대도록 만들며, 따라서 그들에게 오히려 복이 된다. 그러나 사탄의 간교한 공작에 대해서는 경계를 게을리 하기가 매우 쉽다.
그리고 스스로 교만하여 자기들이 진리에 확실히 서 있기 때문에 오류에 빠지거나 외식자들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생각을 갖게 되면, 사탄의 올가미에 더욱 빠지기가 더 쉬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사건이야말로 방금 지적한 이 사실을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수아와 그 휘하의 사람들은 가나안의 왕들과 그들의 거대한 군대를 손쉽게 해치웠지만(수 9:1-12), 사무엘하 21:1에서 보듯이, 이 기브온 사람들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에서 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잘못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부주의와 교만 때문이었다.
이는 우리 주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엄숙한 실례였다 하겠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더 뿌리고 갔더니"(마 13:24-25).
그는 이 비유적인 말씀을 해석하시면서,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 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3:38). 바로 이런 일이 지금 여기서 벌어진 것이다.
원수가 곡식 가운데 독초와 엉겅퀴가 아니라 진짜 곡식 흡사한(겉 모양이 너무도 흡사하여 추수 때까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가짜인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이 기브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본 모습을 감추고,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가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앞에서 말씀한 대로, 이 기브온 사람들에 대해 세 가지로 바라볼 수 있다.
첫째, 세상이 기독교와 연합하고 국가에 병합시킴으로써 그 고유한 증언과 천상적인 성격을 파괴시키기 위해, 후원의 손길을 뻗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헛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느냐"(약 4:4) 라는 극한 책망에 비추어 볼 때에, 그런 거룩하지 못한 조약에 대한 제안이나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불신앙적인 행위는 즉각적으로 거부해야 마땅하다.
둘째, 외식자들이 지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리요"(고후 60:14-15).
이런 하나님의 금지 명령에 비추어, 각 그리스도인의 교회마다 교회의 교제에 가담하고자 하는 자들의 자격 요건을 기도하며 조심스럽게 점검해야 마땅하다.✍️
셋째, 우리의 악한 정욕이 그 본색을 감추고 더 나은 은혜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나타나 우리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고 그것들의 설득 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데에 넘어간다면 그야말로 변명해 여지가 없다는 것이 여기서 다루는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수 9:6).
여기서 길갈이 언급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신명기 27:4, 5의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에발산에서까지 멀리 나아가(수 8:30) 거기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음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한 의미가 거기에 담겨 있다.
이스라엘이 하필 이 특정한 장소에서 그런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더욱 더 핑계의 여지가 없다. 이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길갈"은 5:9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거기서 우리는 그곳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 "애굽의 수치" 를 떠나보낸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곳은 바로, 그들이 여호와와 언약을 맺음으로써 다른 모든 민족에게서 분리되었고(창 17:9-10), 그리고 그분의 섬기는 일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외형적인 표시와 표지를 받은 곳이었다.
그곳은 그들이 유월절을 지킨 곳이기도 했다(수 5:10). 여호와의 규례에 복종하고 그분의 계명에 따라 행하는 자들만이 그와의 하나된 교제를 누릴 수 있었다.🍇
Arthur W. Pink 여호수아 강해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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