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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923》 본문

강해시리즈/요한복음 강해 (An Exposition of John)

《John923》

En Hakkore 2024. 8. 10. 21:59

디베랴 바닷가에서의 그리스도(요 21:1~14)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21:1).

"그 후에"란 말은 요한이 기록한 말씀들에서 항상 명백한 구분을 나타낸다. 이보다 앞서 있었던, 부활하신 구세주의 나타나심은 제자들의 그 당시의 상황과 필요를 고려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의 마음에 확증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그들의 미래의 관계를 예시하시고 묘사하신, 예언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예수께서...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능력, 영광을 드러내 보이셨다. 그것은 단순히 제자들이 그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부활하신 후의 그의 몸은 그의 뜻에 대한 분명한 행위에 의해서만 보여질 수 있다. 그때부터는 이전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내셨다.

까닭 없이 전달의 수단이 바뀌어진 것이 아니다. 이후로 그는 육신에 의해 인지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써 인지되어진 것이다. 인간의 기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성한 지각에 의해 인식되어지게 된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눈으로 봄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크리소스톰).

우리는 사도행전 1:3에서 주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이 이 기간 동안 육신적 존재로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이 가간을 통하여 매일 그들이 주님을 볼 수 있었다는 뜻도 아니다. 그는 그 자신의 뜻에 따라 이 모습으로, 혹은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혹은 보이지 않게 나타나신 것이다.

"디베랴 바다에서."

6:1에서 우리는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라는 말을 읽을 수 있다. 이 "디베랴 바다"는 "갈릴리 바다"의 로마식 명칭이다. 마태복음 28:10에서 부활하신 구세주는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이 말씀은 일곱 제자들이 여기 갈릴리 바다에 있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다른 네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왜 그들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일곱 제자들이 바다에서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은 자명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16 말씀에 명백하게 이같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이때 베드로는 매우 침착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진다. 다른 제자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노라"고 말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일에 있어서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물고기 잡으러 간 이유가 먹을 끼니를 얻을까 했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다음의 부가적인 사건(21:12 참고)을 가능하게 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21:2).

베드로가 맨 앞에 언급된 것은 여기에 열거된 제자들의 순서가 은혜의 순서임을 암시한다. "도마"가 두 번째로 열거된 것 역시 이 사실을 좀 더 확증하고 있다.

그의 의심이 제거됨으로써 열한 제자는 일치된 믿음의 관계로 회복되었으며 다시 상호간에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함께 있더니" 이것은 20:24과 아름다운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도마는 마치 예전보다 제자들의 모임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양 이제 베드로 바로 다음에 이름이 열거되고 있다.

"만일 우리의 간과로 말미암은 손실이 후에 우리를 좀 더 주의 깊게 만든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매튜 헨리).

나다나엘에 대해서 우리는 단지 1:45~51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는 마태복음 10:3에 나오는 바돌로매일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세베대의 아들들"은 그들의 어부의 성격이 강조되고 있다,

이것은 요한이 자기 자신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하지 않은 유일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 표현이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앞에서 열거된 이름들이 은혜의 순서라는 사실과 완전히 일치돤다. 그 다음의 제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Arthur W. Pink 요한복음 p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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