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John877》 본문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의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19:25).
유대인들은 그의 죽는 것을 보려는 잔인한 욕망으로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였다. 로마의 군인들은 의무를 행해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성령님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거기 있었으니, 그들은 가운데 계신 수난자에 대한 사랑에 넘치는 헌신으로 인하여 십자가 주위로 이끌려온 자들이다.
그들은 멀리 서서 바라보지 아니하였으며 거기 참여해 있는 불건전한 군병들과도 섞여 있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 이 가엷은 적은 무리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숫자이다.
왜냐하면 그 다섯이란 수는 은혜의 숫자이며, 이 다섯 명은 인간의 타락과 악의를 드러내고 있는 군병들과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 은혜의 전승 기념물이다.
이 적은 무리는 네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로 되어 있었다. 그 첫째는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녀는 그 때에 삼십여 년 전에 시몬이라는 노인이 "칼이 네 마음을 찌를 듯 하리니"(눅 2:35) 라고 말한 예언의 완전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 둘째는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다. 우리는 그녀에 관한 기록을 거의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소수의 기록에는 그녀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여기 십자가 곁에서와 마태복음 28:1의 무덤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의 이모" 라고 불리어져 있다. 그녀는 요셉의 누이 동생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시누이였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여동생이었다면 마리아라는 동일한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신 여자이며, 또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처음으로 자기를 나타내 보여주신 바로 그 사람이다.
그들이 모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 말은 "비통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어린 양을 보면서 그들의 고뇌는 과연 어떠했겠는가!
또 한 사람의 마리아(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는 여기 없었는데 그 점 역시 중요하다. 여기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네 번째 여자가 거기 있었다(마 27:56). 그녀는 요한의 어머니였다.
그 다섯 번째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였는데 필자가 아는 한 그는 열한 사도 중 거기에 참석해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섰는지라."
"그녀의 신변의 위험도, 그 광경의 애통함도, 그리고 군중의 모욕도 그녀로 하여금 십자가 상의 자기의 거룩한 아들에게 바치는 마지막 의무와 애정을 저지할 수 없었다"(Mr. Doddrige).
그리스도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 이후로 우리는 마리아에 관한 내용을 거의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도 그녀의 생애는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아니하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고뇌가 극한에 이르러 있을 때, 그리고 세상이 그녀가 낳은 아들을 버렸을 때, 그녀는 거기 십자가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아마 유례없는 그 광경을 보고 비탄에 빠졌을 것이며, 그의 고통을 보고 온 몸이 마비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그에 대한 사랑의 황금 사슬에 속박되어 그녀는 거기 서 있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저버렸고, 그의 친구들은 그를 떠나갔으며, 그의 백성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거기,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그곳에 서 있었다.
그가 태어나실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가 죽으실 때에도 그의 곁에 계셨다. 어느 누가 그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Arthur W. Pink 요한복음 p1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