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 Hakkore
[산상수훈 306] 본문
참된 신앙고백 4(마 7:21-27)
"주의 이름으로 귀신(또는 악령)을 쫓아내며."
이것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사람들에게 부여된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재능과 능력 중의 하나였으나 그것은 중생한 자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누가복음 9:49에서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나이다" 라고 한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이 그와 같은 경우인가에 대해서 최소한의 의심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더욱 분명한 경우는 우리 주님을 배반한 자의 경우이다.
마태복음 10:1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시니라" 라고 한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데 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였다.
유다가 이 공적을 수행하지 못하였다면 그의 동료 사도들은 즉시 그를 의심하였을 것이며, 구세주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고 공표하셨을 때에 그들은 "주여 내니이까" 라고 묻지 않고도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셨다는 것을 즉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또는 '능력의 사역' 이나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즉 권능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역' 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11:20에서 다시 나타나는 헬라어이다. 이 능력 역시 유다에게도 부여되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는 중생하지 않은 자를 그의 대변자로 쓰시면서까지 왜 그토록 현저하게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해 주셔야만 하였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면 여러 가지 답변을 할 수가 있다.
첫째로, 위에서 암시하여 준 바와 같이 제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가 모든 인간의 소유자이심을 입증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들을 그가 좋아하시는 대로 쓰실 수 있으며 그 대리자요 그의 도구로 선택하실 수 있는데,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둘째로, 그의 무적의 권능을 보이기 위함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만일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며 모든 사람의 마음도 그러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실을 깨닫는 자는 지극히 적다. 발람은 그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가야바는 그리스도의 원수였으나 그에 관해서 놀라운 예언을 말하게 되었다.
셋째로, 초자연적인 은사나 재능이(비록 그것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사 중 가장 귀중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즉 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의 영원하신 사랑의 대상으로 지정되는 것이다.♡ 발람의 예언과 구속받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새 노래'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으며, 유다가 행한 기적과 빛 가운데에 있는 성도의 기업에 해당하게 되는 것을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은 그와 같이 그의 이름으로 행동하면서 동시에 임명받은 그의 종으로서 처신하며 가장 주목할 만한 재능을 부여받고 초자연적인 사역을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더 암시해 주고 계신다.
교회시대의 초기에도 그와 같았으며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우리 주님께서 이 중생하지 않은 신앙 고백자들에 대해서 사역자들이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아 초자연적인 권능을 행사하였던 1세기의 용어에 따라 서술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 20세기에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지도자들에는 직접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큰 잘못이다.
22절의 내용이 오늘날에는 본질상 있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해서 그 말씀이 오늘날 종교계에서 탁월한 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는 만일 사람들이 지극히 놀라울 정도로 재능을 부여받았던 교회의 초기에 그와 같은 두려운 경고가 필요했다면, 이 타락한 세대에 더 적은 재능과 능력을 가진 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더 적절한 경고인가를 생각해야만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것과 동등한 일은 그의 이름으로 설교하는 일이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들이 오늘날에는 우리가 "도시를 복음화시킴"으로써 사탄의 노예들을 구해 내는 일에 해당된다.
즉 술주정뱅이를 회심시키고, 타락한 여인들을 교화시키며, 마약 중독자들을 회복시키는 일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권능을 행한다는 것은 수 많은 교인들이 출석하는 화려한 건물을 가진 교회와 이교도 땅에서의 '선교사'들의 놀랄 만한 업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중생한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고 그들과 개인적으로 접하여 보면,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심을 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전혀 놀라지도 않고 있다. 또한 주님께서도 전혀 놀라지 않고 계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친히 그의 이름으로 그와 같은 봉사를 하는 '많은 사람' 들에 대해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선포하셨으며,
또한 만일 그 말씀이 기독교 시대의 가장 번영하던 시대에 일을 수행하였던 사람들에게 실제로 해방되는 일이라면 오늘날 기독교 세계가 그토록 배교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한 상태가 똑같이 해당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Arthur W. Pink 산상수훈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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