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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시리즈/산상수훈 강해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 274]

En Hakkore 2024. 7. 31. 09:34

거짓 선지자들 4(마 7:15)

그리스도께 빈 손의 거지처럼 나와서 모든 것에 충분한 구주로서 그를 받아들이는 일 외에 죄인이 필요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으로 인하여 영혼이 치명적으로 잘못 인도되지 않으려면 여기에 대하여 두 가지로 분류하고 부연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 빈 손으로 나아오는 것은 내가 스스로 꾸며낸 의를 버릴 뿐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우상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이 이 세상에 단단히 고착되어 있거나 그가 좋아하는 어떤 죄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한다면, 그는 빈 손을 내밀 수 없다.

사망을 낳는 것들은, 그가 '영생을 붙잡을 수' 있기 전에 버려야만 한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부분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직분의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를 '주, 곧 구세주' 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결코 구원에 이르도록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피를 신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고, 그의 왕권에 굴복하며, 그의 멍에를 메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혼의 안식' 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오늘날 스스로 '복음전도자'가 된 자들은 이 구절을 자주 인용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영접' 이란 단어를 강조하는 대신 '그를 영접' 이라는 말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을 영접한다' 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정신적인 제안이나 교리를 영접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것', 즉 어떤 은사나 혜택을 영접한다는 것이 아니다. 곧 '그를' 즉 여러 가지 직분을 가지고 있고 복음에 소개된 그대로의 그의 인격 전체를 영접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영접한다' 는 것은 빛의 비추임을 받은 이해, 죄를 깨달은 양심, 새로워진 감정, 사랑의 실천, 의지의 행위, 새 주인을 선택함, 그의 명령을 받아들인다(눅 14:26, 27,33)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점에서 멈추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고 말씀하셨고, 주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라"(눅 14:28)고 명하신 것이다.

그 순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이며, 그 다음은 그의 선물이다(롬 8:3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서대로 우리는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하늘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복음을 믿기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 이며 거짓말쟁이이고 영혼을 미혹하는 자들이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고립된 한 행동이 아니라 계속적인 일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도가 배교자와 참된 성도들을 대조시킬 때, 그는 참된 성도들을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히 10:39)라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동사의 시제에 주목해 보자. 과거 어느 때에 '믿음을 가졌던' 자가 아니라 지금 활동하고 있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되어 있다. 이 믿음 안에서 그는 그의 주님이 하신 '바른 말을 본받아'(딤후 1:13) 지켜왔다.

왜냐하면 그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 15; 3:18, 36, 5:24 참조)는 가르침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도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나아온 적이 있었다가 아님]" (벧전 2:4)라고 말하고 있다. 즉 매일 나아오는 것, 이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어떤 인간의 남은 여생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을 추구하면서 계속하여 활동하며 살아 있는 원리이다. 또한 그 믿음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실과 영적 열매들을 통하여 그 결과가 나타나는 생산적인 원리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7).

하나님의 훈계에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서 단순히 복음에 정신적으로 동의한다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마귀들도 하나님의 모든 계시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내세우는 '믿음'은 아무 가치도 효력이 없다.

그러나 구원에 이루는 믿음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행 15:9)이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갈 5:6)이며 세상을 이기는 것(요일 5:4)이다.♡

인간은 이러한 믿음을 일으키거나 조절할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에게 전해졌는가?

Arthur W. Pink 산상수훈 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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